훈요십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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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의 각 조항에는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훈요십조」는 하루 아침에 지은 것이 아니라 태조가 평소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 사건 ==
=== 훈요십조 위조설 ===
[[고려 태조|태조]]가 정말로 훈요십조를 직접 지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여덟째 항목은 당시 [[고려]]의 상황과 관련되어 여러 모순점이 보인다.
 
우선 《[[고려사]]》에 훈요십조가 기재되게 된 경위가 수상쩍다. [[고려 현종|현종]] 때 거란이 침입함에 따라 사초가 불타서 사라져 버려 《[[고려사]]》 〈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야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11세기 초 이후, 현재까지 훈요십조로 전해지는 글은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그의 사망 연도인 [[1046년]] 이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다(《고려사》 93 열전 6 최승로). 어떤 왕에게 바쳐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제안은 [[고려 현종|현종]] · [[고려 덕종|덕종]] · [[고려 정종|정종]] · [[고려 문종|문종]] 치세에 조정에 봉직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시기상 현종의 정변에 의한 즉위를 구실로 침공을 받아, [[개성특급시|개경]]이 약탈당한 거란의 두 번째 침공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문서가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다섯 왕을 비평한 [[최항로]]의 옹사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내용의 언급이 없다. 현종 즉위 이전까지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내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 2조·5조·6조===
 
[[고려 태조|태조]]가 2조에서 당부했던 사찰건립 금지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의 많은 왕과 신하들도 사찰을 많이 지었다. [[고려 광종|광종]]은 대봉은사, 불일사 등 거대한 사찰을 지었고, [[고려 현종|현종]]은 현화사를, [[고려 문종|문종]]도 흥왕사를 지었다. [[김부식]], [[최제언]], [[윤언]], [[최항]] 등 당대 최고 권력가들도 경쟁적으로 개인 사찰을 지었다. [[고려 성종|성종]] 때 [[최승로]]는 '절을 마구 짓는 것을 금해 달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연등회의 팔관회를 성대하게 치루라는 6조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팔관회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고려 태조|태조]]는 5조에서 [[서경 (고려)|서경]]에서 100일간 머물라고 당부했지만, 후대의 국왕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훈요십조에 따르면 [[고려 태조|태조]]는 훈요십조를 명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하지만, 후대 왕들은 훈요십조의 조항을 지키지 않았다. 이는 결국, 역대 고려 왕들은 훈요십조를 일부러 지키지 않은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지키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8조===
[[고려 태조|태조]]가 백제인을 미워했다는 증거가 없다. [[고려 태조|태조]]를 괴롭힌 세력은 [[후백제|백제]] 세력 가운데 오늘날의 [[청주시|청주]] 일대의 호족 세력이었다. [[고려 태조|태조]]의 상당수 측근들은 출신을 예를 들자면, 훈요십조의 다른 항목에서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도선|도선국사]]는 전남 영암 사람이며, 이 고장에서 또한 [[최지몽]]이 출생했으며, 일찌감치 정윤이 되었던 [[고려 혜종|혜종]]의 외가, 곧 [[장화왕후|장화왕후 오씨]]의 본가 역시 나주였고, [[동산원부인|박씨]]와 [[문성왕후|문성왕후 박씨]]는 승주 태생으씨로 견훤의 외손녀이다. 결정적으로 훈요 십조를 전해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 사람이었는데, 옛 백제 사람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옛 백제 출신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 없다. [[고려 태조|태조]]는 생전에 '나주의 40여 개 군은 나의 울타리와 같은 곳으로써 나를 잘 따랐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나주 일대의 해당지역은 [[고려 태조|태조]]가 [[고려]]의 건국 이전에 수군으로 정복한 지역이다. 또한 [[승주]] 출신의 [[박영규 (후백제)|박영규]], [[남원]] 출신의 [[현소]], 나주 출신의 [[윤다라]], 아주 수국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김심엄]], 광산 출신의 [[김길]] 등이 계속해서 등용이 됐기 때문에 결국 훈요 십조가 위조된 내용이 아니냐는 것이다.
 
== 각주 및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