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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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가계===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淸風)으로 족보에는 [[조선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명성 왕후]]의 친정 아버지로 왕의 장인이었던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을 김유정의 선조로 적고 있다. 할아버지 익찬(益贊, 1845년 ~ 1909년)은 자를 자영(士英)이라 했으며, [[1891년]]에 증광시 진사시에 급제하여<ref>김익찬의 진사방목,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78&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78&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date=20140224004911 }}</ref> 통 사랑 행의 금부도사를 지냈다.<ref>김춘식의 진사시방목 중 가족사항 서술,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date=20140224004809 }}</ref> 익찬의 아들인 춘식(春植), 즉 김유정의 아버지는 자를 윤주(允周)라 하였는데, [[1894년]]에 식년시 진사시에 급제하여<ref>김춘식의 진사방목,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date=20140224004809 }}</ref>, 사마좌 임금 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 예식 부주사<ref>일성록 광무 4년,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0&month=10&day=29&kingname=%EA%B4%91%EB%AC%B4</ref>, 궁내 부의관을 역임하였다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 신남역([[2004년]] [[김유정역]]으로 변경)이 있는 이 곳은 [[김유정]]의 선대 집안이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ref>일성록 광무흔히 6년김유정의 출생지를 [[춘천]]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2&month=6&day=24&kingname=%EA%B4%91%EB%AC%B4</ref>김유정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가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 출생지 ===
김유정의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2남 6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김유정의 고향은 실레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경춘선]] 신남역([[2004년]] [[김유정역]]으로 변경)이 있는 이 곳은 [[김유정]]의 선대 집안이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흔히 김유정의 출생지를 [[춘천]]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김유정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가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김유정]]이 [[춘천]]에서 태어났음을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전상국]]은 대대로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김유정의 선대가 춘천 의병이 잇따라 봉기하던 구한말 경술국치 때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식솔들을 그 곳으로 이주시켰고 김유정도 이 무렵에 태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혹은 [[일본]]의 재산 몰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한편 김유정 본인은 자신의 고향을 [[춘천]]으로 생각하여, 〈오월의 산골작이〉라는 수필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아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중략)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마치 딴 세상 사람을 보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 유년기 ===
김유정의 어머니는 김유정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고, 그가 일곱 살이 되던 [[1915년]] 3월 18일에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도 2년 뒤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된 형 김유근은 집안에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등 방탕한 짓을 일삼아서 가세는 기울었고, [[진골]]에서 [[관철동]]으로, 다시 [[숭인동 (서울)|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고 그때마다 집의 규모도 줄어들었다.(이러한 [[김유근]]의 모습은 훗날 김유정 자신의 단편소설 〈[[형 (소설)|형]]〉에 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16년]]부터 [[1919년]] 봄까지 김유정은 4년 동안 이웃 글방에 다니며 《[[천자문]]》, 《계몽편》, 《[[통감]]》 등을 배우고, 붓글씨를 익혔다. 만 12세에 에울입월초등학교 이듬해 3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4학년으로 졸업할 정도로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며, [[1923년]] 4월 9일에는 [[휘문고등학교|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5년제)에 검정으로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김유정은 이름을 잠시 나이(羅伊)로 바꾸었다가 3학년 때 다시 본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숭인동 (서울)|숭인동]] 80번지로 다시 이사하였는데, 휘문고보에서 [[안회남]](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야구]] · [[축구]] · [[스케이팅]] · [[권투]] ·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채로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해 버렸다. 운동장에서형으로부터의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은 봉익동에서 [[투포환적십자 병원]] 의사 일을 하던 삼촌집에 잠시 머무르다 곧 누나들과 형수의 집을 전전했고 이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특히 [[휘문고보]] 재학 시절부터 [[치질]]을 가슴에앓게 맞고도 끄떡하지김유정은 않을삼촌의 정도였던도움으로 그는수술을 교내에받게 된 뒤에도 [[하모니카늑막염]]이나 서클을[[폐결핵]] 등의 병이 만들기도연속적으로 했으며발생하여, 3학년친구 안회남에게 몸이"가슴이 좋지뜨끔뜨끔 않아아프다"고 1년하소연하기도 휴학하고했다고 집에서한다. 21세 즈음,때 [[휘문고보]]를 졸업(제21회)한 김유정은 당시이듬해인 [[단성사1930년]] 개관기념4월 행사에서6일에 단상에[[연세대학교|경성 올라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두 달 만인 [[하모니카6월 24일]]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중퇴하고 만다. 제적 사유에 대해서는 퇴학자 명단에만 기록이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이 없지만, 대체로 수업 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독주를못했을 하기도가능성이 했다지적된다.
 
=== 청년기 ===
김유정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형 김유근은 마침내 서울에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남겨둔 채로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해 버렸다. 형으로부터의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은 봉익동에서 [[적십자 병원]] 의사 일을 하던 삼촌집에 잠시 머무르다 곧 누나들과 형수의 집을 전전했고 이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특히 [[휘문고보]] 재학 시절부터 [[치질]]을 앓게 된 김유정은 삼촌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게 된 뒤에도 [[늑막염]]이나 [[폐결핵]] 등의 병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친구 안회남에게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21세 때 [[휘문고보]]를 졸업(제21회)한 김유정은 이듬해인 [[1930년]] 4월 6일에 [[연세대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두 달 만인 [[6월 24일]]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중퇴하고 만다. 제적 사유에 대해서는 퇴학자 명단에만 기록이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이 없지만, 대체로 수업 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4살 연상의 기생 [[박록주]]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밤새워 편지를 써서 보내는가 하면 혈서를 써서 전하기도 하고, 선물도 보냈지만 번번이 되돌아왔으며, 직접 찾아가 구애하기도 하고 박록주가 나가는 요정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에 탄 그녀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김유정의 병적인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괴로워하던 김유정은 어느 날 갑자기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앞서 김유근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상황에서 마침 둘째 누이의 동거남이었던 매형 정씨의 부추김을 받아,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김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낙향이었지만, [[춘천]]에서 [[김유정]]은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당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 브나로드 운동 ===
[[춘천]]에서 김유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들병이(이리저리 떠돌며 술을 파는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1931년]] 다시 상경한 [[김유정]]은 [[고려대학교|경성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도 곧 퇴학하고 말았고,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가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소설)|노다지]]〉, 〈[[금 (소설)|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고향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1년 7개월을 머무르면서 김유정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짓고 옛날 자신의 마름집 아들이었던 조명희나 조카 김영수(김유근의 아들) 등과 뜻을 함께 하여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여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춘천문화방송]]에서 김유정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김유정은 [[민중]]들을 사랑하여, 명문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존댓말을 하였다고 한다. 김유정이 조직한 농우회는 뒤에 '금병의숙'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간이학교로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지금엔 그곳에 면에서 운영하는 마을회관이 서있고 그 옆에 김유정의 뜻을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방송통신대학교]] [[한국 문학|국어국문학과]] 4학년 2학기 문학답사 형식 수업인 《국문학연습》에 의하면, 김유정 작가가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을 한 살레마을에서는 살레 사회복지관을 운영함으로써 [[빈곤]]과 빈곤한 부모의 무지로 인해 [[학습|배움]]에서 소외된 가난한 [[농민]]들의 자녀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김유정 작가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
 
[[1932년]] 6월 15일에 김유정은 자신의 첫 작품인 〈[[심청 (김유정의 소설)|심청]]〉을 탈고하였다(이 작품은 4년 뒤인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발표되었다).
 
한편 김유근은 고향 [[춘천]]에서도 가산을 완전히 정리한 뒤, 그곳에 있던 조상의 무덤까지 파서 화장해버렸다. 형으로부터 '청산된 금액의 1/30' 만큼의 돈을 얻은 김유정은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이때 김유정은 늑막염이 악화된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폐결핵]]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공장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누나의 히스테리 증세에 그 누나에게 얹혀 사는 건달이나 다름없는 매형 정씨에 대한 미움까지 겹쳤는데, 이것은 훗날 김유정의 문학세계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문단 생활 ===
이미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하였다. 이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차에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 (소설)|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4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4살 연상의 기생 [[박록주]]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밤새워 편지를 써서 보내는가 하면 혈서를 써서 전하기도 하고, 선물도 보냈지만 번번이 되돌아왔으며, 직접 찾아가 구애하기도 하고 박록주가 나가는 요정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에 탄 그녀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김유정의 병적인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괴로워하던 김유정은 어느 날 갑자기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앞서 김유근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상황에서 마침 둘째 누이의 동거남이었던 매형 정씨의 부추김을 받아,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김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낙향이었지만, [[춘천]]에서 [[김유정]]은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당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앙』지에
[[1934년]]에 김유정은 사직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식객살이를 시작했다. 김유정에게는 무수히 많은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왔고, 김유정 자신도 약값을 벌기 위해 청탁이 오는 대로 글을 썼지만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여성》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의 글을 읽게 된 김유정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라는 여인을 향해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 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가 약혼을 했으며 곧바로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되었다.
 
== 주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