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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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문 ==
안평대군의 발문을 요약하면, 내가 정묘년<ref>1447년</ref>4월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ref>仁叟,朴彭年,박팽년</ref>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 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ref>山冠野服,소박한 복장</ref>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ref>(貞父,崔恒,최항)</ref>.범용<ref>(泛翁,申叔舟,신숙주)</ref>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있다.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 무계정사 ==
꿈속 도원과 비슷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을 찾아내어, 지리와 복서(卜筮)에 뛰어났던 이현로(李賢老)로 하여금 터를 보게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용이 일어날 땅(旁龍所興)’ 이라 하여 별당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가 세종 29년(1447) 8월 30일인데, 태조 5년(1396)에 세운 도성의 정문 [[숭례문]](崇禮門)이 비좁고 남루하여, 왕은 좌참찬 [[정분]](鄭笨)에게 명 하여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개축(改築)하게 되는데, 분(笨)은 신작이라 기록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하였고, 용(瑢)<ref>안평대군</ref>은 친분이 두터웠던 분(笨)에게 [[장인]](工匠)과 재목및 기와를 요청하니, 분은 선공 부정 이명민을 시켜 숭례문을 완공한 후 남은 자재로 도성 밖 부암동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워주어, 만여권의 책을 갖추고 또 마포 용산강(龍山江)위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시화를 즐겼다. 특히 안평대군과 또래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등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절친한 사이이기에 같이 어울려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특히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1450)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서 21명의 문사들과 치지정(致知亭)에서 몽유도원도를 감상 하면서,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시(詩) 한수를 지어 붙이는데, 자리를 같이한 문사들의 찬문을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