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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두의 두 설화 중 온조설에 의하면,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의 남쪽 지방으로 도망쳤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띠고, 동은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웠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지 못하여 동생이 세운 나라로 이주하자 자결하였다.<ref name=":0">《[[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ref>
 
[[백제]]의 시조가 비류라는 [[시조 비류설]]에 따르면, 어머니 [[소서노]]는 [[졸본]] 사람으로 [[우태]]에게 시집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의 사후에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이 [[졸본]]에 도읍하고 [[고구려]]를 세운 뒤 [[소서노]]를 맞아 왕비로 삼고 비류와 [[온조]]를 양자로 삼았다. 이후 [[부여]]에서 예씨(禮氏)의 아들 [[유리명왕|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가 [[미추홀]]에서 살았다고 한다.
 
[[백제]] 시조에 대해서는 그 외에 [[시조 온조설]]과 [[시조 구태설]]이 있으며,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비류로, 동생은 [[온조]]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는 왕위에 오르는 가장 유력한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비류와 [[온조]]를 얻기 이전에 [[동명성왕]]과 [[북부여]]의 예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동명성왕]]이 반겼다. 게다가 [[동명성왕]]은 첫째 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후일이 두려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한다.
 
== 사료속 언급 ==
 
=== 삼국사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두에서는 두 가지 설화를 소개한다. 처음에 정설로 소개되는 것은 [[온조]]가 백제의 시조라는 설로, 비류와 온조가 같이 남하해 처음에 각자 미추홀,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비류의 사망 이후 비류계 백성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비류는 온조의 형이자 백성들을 평안히 하는데 실패한 인물로 등장한다.<ref name=":0">《[[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ref>
 
이후 일설로 비류가 백제의 시조라는 설을 소개하는데, 여기서는 비류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여 그 나라가 이어진 것으로 서술된다.<ref name=":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