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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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黃山伐 戰鬪)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삼국사기]]》 [[계백]] 열전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오하요
== 배경 ==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노중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A9%EC%82%B0%EB%B2%8C%20%EC%A0%84%ED%88%AC&ridx=0&tot=640#self 황산벌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ref name="글로벌-신라의삼국통일">[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D%95%9C%EA%B5%AD%EC%82%AC/%EA%B3%A0%EB%8C%80%EC%82%AC%ED%9A%8C%EC%9D%98_%EB%B0%9C%EC%A0%84/%ED%86%B5%EC%9D%BC%EC%8B%A0%EB%9D%BC%EC%99%80_%EB%B0%9C%ED%95%B4/%EC%8B%A0%EB%9D%BC%EC%9D%98_%EC%82%BC%EA%B5%AD%ED%86%B5%EC%9D%BC#%EC%8B%A0%EB%9D%BC%EC%9D%98_%EC%82%BC%EA%B5%AD%ED%86%B5%EC%9D%BC%E3%80%94%E6%A7%AA%E8%AA%AA%E3%80%95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신라의 삼국통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당나라|당]]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ref name="삼국유사-태종이"/>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ref name="삼국유사-태종이">[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8&itemId=sy&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4&levelId=sy_001r_0020_0360_0090 《삼국유사》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으로 진격하였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炭峴)<ref group="주">[[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옥천군)|군북면]] 부근의 고개로 비정됨</ref>으로 진격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방면으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 정예군을 우선 막을 것을 주장하여 분열이 일어났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ref name="삼국사기-계백이출정의">[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47r_0150_0040&position=-1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계백(階伯) > 계백이 출정의 의지를 다지다(660년 6월(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