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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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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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ref name=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wikt:유업|유업(儒業)]]에 종사하여, 어려서부터 종조부(從祖父) 사촌(沙村)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wikt:유아|유아(儒雅)]]를 쌓기 시작하였고<ref name='gj79s' />, 14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에 형 덕홍(德弘), 매부 김응회(金應會), 묵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sfnp|오수열|황태섭|2014|p=3~4}}<ref name='gjsgcc742'>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2 김덕홍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ref name='gjsgcc' />{{sfn|문화자원총람|p=5~7}}{{sfnp|김세곤|2013|p=330}}<ref name='mchosun'>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708100020 문갑식의 주유천하 〈16〉 취가정과 비운의 의병장(義兵將)들] 월간조선, 2017년 8월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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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거하였다. 여러 곳을 떠돌다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 집을 짓고 은거하고 죽을 때까지 지내는데, 그 집이 바로 [[풍암정]](楓巖亭)이다. 뒷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덕보는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였고, 그해 [[음력 11월 28일|11월 28일]] 한 많은 세상을 뜬다. 안방준은 김덕령의 원통한 사연을 김덕보에게서 듣고 〈[[삼원기사]]〉(三寃記事)를 썼다.{{sfnp|김세곤|2013|p=426~428}}<ref name='gjstory741'>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1 김덕보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
친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외가가 있던 [[전라도]] [[익산군]] [[용안면]](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 김씨|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 그의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숙천군]] 근처)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ref name=
한편 김덕령의 죽음을 들은 일본군은 기쁜 얼굴로 서로 치하하였다.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덕령이 청원한 대로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이인경]](李寅卿)도 담략과 용기가 있고 술수(術數)를 알았는데 무과를 거쳐 일본군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덕령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경계하여 벼슬이 변방 군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병을 칭탁하여 사임하고는 생을 마칠 때까지 감히 큰 장령(將領)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ref name='knb_12908001_001' />{{sfnp|김세곤|2013|p=423~42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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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존 ====
[[1661년]]([[조선 현종|현종]] 2년) [[음력 8월 30일|8월 30일]] 현종이 [[가뭄|한재(旱災)]] 때문에 [[관찰사|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신설(伸雪){{refn | group="주" | 신설(伸雪), 신원설치(伸寃雪恥) :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고 창피스러운 일을 씻어 버림 }}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는데, 반고(盤皐) 김시진(金始振)이 김덕령을 아뢰자, 특명으로 신원(伸寃)하여 관작을 복원해주었다.<ref name=
[[1668년]](현종 9년) [[음력 4월 13일|4월 13일]] 교리(校理) [[이단하]](李端夏)가 요청하여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였는데, 정6품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정3품 [[참의|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당상관]]에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내렸다.<ref name='krb_10904013_005' /><ref name='kra_200001'> [http://sillok.history.go.kr/id/kra_200001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ref><ref name='wra_10904013_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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