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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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공직자 정보
|이름 = 김개똥
|원어명= 金德齡
|그림 = 초등대한역사 제4편 5.jpg
|직책 = 조선국 선전관청 예하 선전관
|임기 = 1594년 2월 1일~1594년 3월 31일
|군주 = [[선조 (조선)|조선 선조 이연]]
|출생일= [[1567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
|출생지= [[조선]] [[전라도]] [[광산군|광주군]] [[광주광역시|광주읍]]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모함으로 인한 옥사이자 고문 후유증 병사)
|사망일= [[1596년]] [[음력 8월 21일|8월 21일]] (30세/만28세)
|거주지= [[조선]]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
|정당 = 서인 세력 후예
|국적= [[조선]]
|별명=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석저장군(石底將軍).
|학력= [[한학]] 수학
|경력= 군인 겸 의병장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흥양 이씨]] 부인
|자녀= 아들 [[용안 김씨|김광옥]](金光沃)
|부모= 김붕섭(부), [[남평 반씨]] 부인(모)
|친인척 = 외조부 반계종<br/>처남 [[이인경]](李寅卿)<br/>봉사손 김거(金璩)
|형제= 형 김덕홍(金德弘)<br/>남동생 김덕보(金德普).
|서명=
|웹사이트=
}}
{{한국 이름
| 제목 = 김덕령
| 한글 표기 = 김덕령
| 한자 표기 = 金德齡
| 개정 로마자 표기 = Gim Deokry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Tŏkryŏng
| 예일 표기 = Kim Teklyeng
| 공식 로마자 표기 =
}}
'''김덕령'''(金德齡, [[1568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1596년]] [[음력 8월 21일|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초승장(超乘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忠勇將) 등이며,<ref name='tn국조인물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803&cid=62132&categoryId=62132 김덕령 ::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ref><ref name='E000893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931 김덕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 name='duklung'>{{웹 인용 |url=http://kwangsankim.ne.kr/inmul/duklung.htm |제목=김덕령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 |확인날짜=2020-07-22 |archive-date=2020-07-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2035103/http://kwangsankim.ne.kr/inmul/duklung.htm }}</ref><ref name='memoryhonam'>{{웹 인용 |url=http://www.memoryhonam.co.kr/sub03/sub04_detail.php?page=&SeCate=&seq=969 |제목=김충장공옥사사초 - 호남기록유산 |확인날짜=2020-07-22 |archive-date=2020-07-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2035324/http://www.memoryhonam.co.kr/sub03/sub04_detail.php?page=&SeCate=&seq=969 |url-status= }}</ref><ref name='gjsgcc'>{{웹 인용 |url=http://gjsgcc.or.kr/ko/35/view?SEQ=2273 |제목=김덕령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확인날짜=2020-07-22 |archive-date=2020-07-2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2035448/http://gjsgcc.or.kr/ko/35/view?SEQ=2273 |url-status= }}</ref> 일본군은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ref name='tn국조인물고' />{{sfnp|김세곤|2013|p=388~389}}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ref name='rootsinfo586'>{{웹 인용 |url=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586 |제목=용안 김씨 |확인날짜=2020-05-18 |archive-date=2020-07-2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3052027/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586 |url-status=dead }}</ref>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만26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sfnp|김세곤|2013|p=361~363}}{{sfnp|오수열|황태섭|2014|p=3~4}}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 별다른 공은 없으며, 1594년(선조 27년) 수륙합동 작전이 이루어졌던 [[장문포 해전]]에도 김덕령이 참전했으나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다.
 
그 뒤 부하 장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다 죽게 한 일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1596년(선조 29년) 2월 말에 풀려났다. 그러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려 출병하였으나, 난이 끝나 돌아오다가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등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 김덕령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ref name='kra_10208030_005'>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208030_005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8월 30일 병자 5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김덕령을 신원시키고 복관해 주도록 명하다]</ref><ref name='krb_10208030_006'>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208030_006 현종개수실록 6권, 현종 2년 8월 30일 병자 6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고 충용장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ref> [[1788년]]([[정조]] 12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해광 송제민은 그와 내외종사촌 사이이다.<ref>송시열, 《송자대전》 권193, 해광 처사 송 공 묘표</ref>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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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ref name='"tn국조인물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803&cid=62132&categoryId=62132 김덕령 ::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ref><ref name='"E000893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931 김덕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 name='"duklung'">{{웹 인용|url=http://kwangsankim.ne.kr/inmul/duklung.htm|제목=김덕령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2035103/http://kwangsankim.ne.kr/inmul/duklung.htm|archive-date=2020-07-22|확인날짜=2020-07-22}}</ref><ref name='gj740'>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0 김덕령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ref name='gj79s'> [http://gjstory.or.kr/sub.html?pid=11&formtype=view&code=79 김덕령 :: 스토리 1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refn | group="주" | 김덕령의 아버지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鵬燮(붕섭)으로 나오는 자료는 조선 정조 때 편찬한 《[[국조인물고]]》<ref name='tn국조인물고' />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name='E0008931'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ref name='duklung' />, 광주문화역사자원<ref name='gj740' /> 등이며, 鵬邊(붕변)으로 나오는 자료는 김충장공옥사사초 소개 웹페이지<ref name='memoryhonam' />이며, 鵬變(붕변)으로 나오는 자료는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ref name='gjsgcc' />,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자원총람》{{sfn|문화자원총람|p=5~7}} 등이다. }}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위로는 형 덕홍(德弘)과 누나 3명이, 아래로는 아우 덕보(德普)가 있다.<ref name='E0008931' /><ref name='"gjsgcc'">{{웹 인용|url=http://gjsgcc.or.kr/ko/35/view?SEQ=2273|제목=김덕령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2035448/http://gjsgcc.or.kr/ko/35/view?SEQ=2273|archive-date=2020-07-22|url-status=|확인날짜=2020-07-22}}</ref>{{sfn|문화자원총람|p=5~7}}{{sfnp|김세곤|2013|p=330}}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wikt:유업|유업(儒業)]]에 종사하여, 어려서부터 종조부(從祖父) 사촌(沙村)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wikt:유아|유아(儒雅)]]를 쌓기 시작하였고<ref name='gj79s' />, 14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에 형 덕홍(德弘), 매부 김응회(金應會), 묵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sfnp|오수열|황태섭|2014|p=3~4}}<ref name='gjsgcc742'>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2 김덕홍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ref name='gjsgcc' />{{sfn|문화자원총람|p=5~7}}{{sfnp|김세곤|2013|p=330}}<ref name='mchosun'>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708100020 문갑식의 주유천하 〈16〉 취가정과 비운의 의병장(義兵將)들] 월간조선, 2017년 8월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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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거하였다. 여러 곳을 떠돌다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 집을 짓고 은거하고 죽을 때까지 지내는데, 그 집이 바로 [[풍암정]](楓巖亭)이다. 뒷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덕보는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였고, 그해 [[음력 11월 28일|11월 28일]] 한 많은 세상을 뜬다. 안방준은 김덕령의 원통한 사연을 김덕보에게서 듣고 〈[[삼원기사]]〉(三寃記事)를 썼다.{{sfnp|김세곤|2013|p=426~428}}<ref name='gjstory741'>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1 김덕보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
 
친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외가가 있던 [[전라도]] [[익산군]] [[용안면]](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 김씨|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 그의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숙천군]] 근처)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ref name='"rootsinfo586'">{{웹 인용|url=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586|제목=용안 김씨|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0723052027/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586|archive-date=2020-07-23|url-status=dead|확인날짜=2020-05-18}}</ref><ref name='kwangsankim'> [http://kwangsankim.co.kr/bbs/board.php?bo_table=kwangsan43&wr_id=669 또다른 광산김씨 > 보학자료 | 광산김씨대종중]</ref>
 
한편 김덕령의 죽음을 들은 일본군은 기쁜 얼굴로 서로 치하하였다.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덕령이 청원한 대로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이인경]](李寅卿)도 담략과 용기가 있고 술수(術數)를 알았는데 무과를 거쳐 일본군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덕령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경계하여 벼슬이 변방 군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병을 칭탁하여 사임하고는 생을 마칠 때까지 감히 큰 장령(將領)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ref name='knb_12908001_001' />{{sfnp|김세곤|2013|p=423~42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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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존 ====
 
[[1661년]]([[조선 현종|현종]] 2년) [[음력 8월 30일|8월 30일]] 현종이 [[가뭄|한재(旱災)]] 때문에 [[관찰사|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신설(伸雪){{refn | group="주" | 신설(伸雪), 신원설치(伸寃雪恥) :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고 창피스러운 일을 씻어 버림 }}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는데, 반고(盤皐) 김시진(金始振)이 김덕령을 아뢰자, 특명으로 신원(伸寃)하여 관작을 복원해주었다.<ref name='"kra_10208030_005'">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208030_005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8월 30일 병자 5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김덕령을 신원시키고 복관해 주도록 명하다]</ref><ref name='"krb_10208030_006'">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208030_006 현종개수실록 6권, 현종 2년 8월 30일 병자 6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고 충용장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ref><ref name='M_0001463'> [http://sillok.history.go.kr/manInfo/popManDetail.do?manId=M_0001463 조선왕조실록 : 인물정보 상세보기 : 김덕령]</ref>
 
[[1668년]](현종 9년) [[음력 4월 13일|4월 13일]] 교리(校理) [[이단하]](李端夏)가 요청하여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였는데, 정6품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정3품 [[참의|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당상관]]에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내렸다.<ref name='krb_10904013_005' /><ref name='kra_200001'> [http://sillok.history.go.kr/id/kra_200001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ref><ref name='wra_10904013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