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붕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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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루흐 전선 ====
1989년 1월 22일, [[리비우]]와 [[키예프]]에선 우크라이나 독립 기념일을 축하했다. 리비우에선 수천명이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리비우)|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앞에 모여 [[몰레벤|감사 기도]]를기도를 드렸다. 키예프에선 활동가 60명이 모여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립기념일을 기념했다.<ref name="ukrweekly.com" /> 2월 11-12일엔 우크라이나어 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다. 2월 15일엔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의 재탄생을 위한 구상위원회 구성이 발표되었다. 이 운동은 [[우크라이나 작가 협회]]가 처음 제안하였으며 1989년 2월 16일 "문학 우크라이나"({{llang|uk|Literaturna Ukraina}}) 저널에 발표되었다. 이 조직은 [[비야체슬라우 초르노빌]]과 같은 우크라이나 반체제 인사의 전령이었다.<ref name="ukrweekly.com" />
 
2월 말엔 3월 26일 열릴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를 앞두고 키예프에서 선거법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으며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의 사임을 촉구했다. 이 시위는 고르바초프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날에 일어났다. 2월 26일엔 리비우에서 22,000명에서 30,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19세기 우크라이나 예술가이자 민족주의자인 [[타라스 셰우첸코]] 사망을 추모하는 소련에게 허가받지 않은 행사를 가졌다.<ref name="ukrweekly.com" />
 
3월 4일엔 키예프에선 스탈린 치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소비에트의 사회와 관습을 정화하자는 운동의 '메모리얼 사회 모임'이 창설되었다. 다음날엔 시가 행진이 이어졌다. 3월 12일엔 리비우에서 우크라이나 헬싱키 연합, [[카톨릭 마리아 운동|마리아 사회단체]] 밀로세르디아(Myloserdia)가 조직한 예비선거모임이 강제로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300명이 구금되었다. 3월 26일엔 소련 전국대표대회 선거가 열렸으며 4월 9일, 5월 14일, 5월 21일에 [[재보궐선거]]가 열렸다. 우크라이나에 배정된 의석 225석 대부분은 보수파가 차지했으나 일부 소수 의석은 진보파가 차지하였다.<ref name="ukrweekly.com" />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선거 전 회동에선 리비우에서의 4일 연속 열릴 선거를 앞두고 25,00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 회동엔 8개 지역 공장과 기관에 1시간 경고성 파업도 있었다. 이 파업은 1944년 이후 리비우에서 처음 있는 파업이었다. 5월 3일 열린 선거 전 행진에선 3만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5월 7일, '메모리얼 사회 모임'은 스탈린주의 테러로 희생된 우크라이나인 및 폴란드인 집단무덤이 있는 [[비키우냔스키 무덤|비키우냔스키]]에서 시위를 가졌다. 키예프 시내에서 집단무덤까지 행진을 연 후 추도식을 가졌다.<ref name="ukrweekly.com" />
 
1989년 5월 중순부터 9월까진 우크라이나의 그리스 정교회 단식투쟁 시위대가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가에 시위를 열어 교회의 곤경에 대해 알렸다. 특히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교회총회 행사 중 시위가 격렬했다. 이 시위는 9월 18일 시위대가 체포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한편 5월 27일 리비우에선 리비우 지역 메모리얼 사회 모임 창립 총회가 열렸다. 6월 18일엔 서우크라이나의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추기경 [[미로슬라우 이반 류바치우스키]]가 선포한 국제 추모의 날 행사로 대략 10만명이 공개적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ref name="ukrweekly.com" />
 
8월 19일, 성 베드로와 성 파울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로 바뀔 것이라고 발표했다. 9월 2일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수만명이 선거법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및 관련 기구에 배정된 특별의석 규정을 없애라는 시위를 열었다. 이 시위는 리비우에서 5만명, 키예프에서 4만명, [[지토미르]]에서 만명, [[카미얀스케|드니프로제르진스크]]와 [[체르보노흐라드]]에서 각각 5천명, [[하르키우]]에서 2천명이 합세했다. 9월 8일부터 10일까진 키예프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인민 운동]], 일명 루흐 전선의 창립 총회에서 작가 [[이반 드라치]]가 당수로 취임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0900209204012 |제목 = 蘇우크라이나共에도 민간 정치단체 출범 黨통치불복종선언 |출판사 = 동아일보 |날짜 = 1989년 9월 9일 |확인날짜 = 2018년 2월 2일}}</ref> 9월 17일엔 리비우에서 15만-20만명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합법화를 요구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1800209204001 |제목 = 蘇 民族분규 宗敎飛火 양상 |출판사 = 동아일보 |날짜 = 1989년 9월 18일 |확인날짜 = 2018년 2월 2일}}</ref> 9월 21일엔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남쪽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데미야니우 라즈]] 집단무덤 발굴을 시작했다. 9월 28일엔 [[우크라이나 공산당 (소련)|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이자 브레즈네프 파였던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가 해임되고 [[블라디미르 이바시코]]가 제1서기로 추대되었다.<ref name="ukrweekly.com" />
 
10월 1일엔 리비우의 드루즈바 스타디움 앞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영토의 소비에트 "재통일"을 기념하는 콘서트가 열린 자리에 일어난 10,000-15,000명의 시위대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10월 10일엔 이바노프란키브시크에서 열린 예비선거 시위에 3만명이 참여했다. 10월 15일 열린 선거법 시위에선 체르보노흐라드, [[체르니우치]], [[리우네]], [[지토미르]]에서 수천명이, [[드니프로|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500명, 리비우에서 3만명이 모였다. 10월 20일엔 1930년대 강제해산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 성직자들이 리비우에서 처음 모임을 가졌다.<ref name="ukrweekl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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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엔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가 1990년 1월 1일부터 [[우크라이나어]]가 공화국의 공식 언어이며, 러시아어는 소수민족의 의사소통 용도로 쓰일 것이라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리비우 예수의 변모 교회 신자들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떠나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교회 교도라고 선언했다. 다음날엔 데미야니우 라즈 집단무덤 추도식에 수천 명이 참석했으며 "1939-1941년 억압의 희생자들"이라는 글씨가 쓰인 추모비가 세워졌다.<ref name="ukrweekly.com" />
 
11월 중순엔 셰브첸코 우크라이나어학회가 정식 단체로 인정받았다. 11월 19일엔 키예프에서 열린 [[우랄산맥]]의 제36[[굴라크]]로 끌려가 사망한 인권운동가 [[바실 스투스]], [[올렉시 이바노비치]], [[리트빈 유리 티모노비치]] 3명에 대한 공개 추도식에 친구, 가족 등을 포함하여 수천명이 참여했다. 이 3명은 [[바이코베 묘지]]에묘지에 안장되었다. 11월 26일엔 밀로슬라프 루바치비 추기경이 기도와 금식의 날을 선포하였고, 우크라이나 서부에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고르바초프의 회담 전날에 수천명이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 11월 28일엔 우크라이나 SSR 종교위원회가 우크라이나 카톨릭교회를 합법적 종교조직으로 인정하는 안건을 통과했다. 이 법령은 12월 1일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바티칸 회동과 동시에 선포되었다.<ref name="ukrweekly.com" />
 
12월 10일, 리비우에선 처음으로 [[인권의 날|국제 인권의 날]] 행사가 열렸다. 12월 17일엔 12월 14일 사망한 노벨상 수상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사망을 추모하며 키예프에서 약 3만명이 추도식에 참여했다. 12월 26일,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 대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령을 통과했다.<ref name="ukrweek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