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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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마이클 잭슨<br >Michael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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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지프 잭슨'''<ref>County of Los Angeles Department of Health Services (2009). [[:파일:Michael Jackson death certificate.jpg|Michael Jackson death certificate]].</ref><ref name="allmusic">{{웹 인용|first= Steve |last= Huey |title= Michael Jackson – Artist Biography |url= http://www.allmusic.com/artist/michael-jackson-mn0000467203/biography |publisher= [[AllMusic]]. [[All Media Network]] |accessdate= May 31, 2015}}</ref>({{llang|en|Michael Joseph Jackson}}, [[:en:National Order of Merit (Gabon)|ONM]],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무용가]], [[배우]]이다. [[팝]]의 황제<ref name="LJ3">Lewis Jones, 2005, p. 3 : "He wears the crown as the King Of Pop because no artist has broken his record of selling nearly 60 million copies of a single Album (Thriller)".</ref><ref name="Arar">{{뉴스 인용|first= Yardena |last= Arar |date= February 29, 1984 |title= Michael Jackson coronated latest king of rock 'n' roll |newspaper= [[Boca Raton News]] |page= 7A}}</ref><ref name="SBee">{{뉴스 인용|title= Is the thrill gone for singer Michael Jackson? |newspaper= [[Sacramento Bee]] |date= July 27, 1987 |page= B3}}</ref><ref>{{웹 인용|title= Michael Jackson: 10 Achievements That Made Him The King Of Pop |date= June 24, 2014 |accessdate= October 20, 2016 |publisher= Grammy.com |url= http://www.grammy.com/blogs/michael-jackson-10-achievements-that-made-him-the-king-of-pop}}</ref>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존재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생전에 2번의 아동성추행 소송에 휘말렸다.
 
[[기네스 세계 기록]]에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로 등재되었으며, [[음악]], [[춤]], [[패션]]에 많은 공헌<ref>{{뉴스 인용|first= Kasmin |last= Fernandes |title= Why Michael Jackson was a style icon |newspaper= [[The Times of India]] |date= June 25, 2014 |accessdate= March 11, 2016 |url= http://timesofindia.indiatimes.com/life-style/fashion/style-guide/Why-Michael-Jackson-was-a-style-icon/articleshow/37175580.cms?from=mdr}}</ref><ref>{{보도자료 인용|first= Don |last= Lemon |title= Michael Jackson's style influence lives on |agency= [[CNN]] |date= June 23, 2010 |accessdate= March 11, 2016 |url= http://edition.cnn.com/2010/SHOWBIZ/06/23/michael.jackson.fashion/}}</ref><ref>{{뉴스 인용|first= Jocelyn |last= Vena |title= Michael Jackson's Style Legacy, From Military Jackets To One Glove |date= June 26, 2009 |publisher= [[MTV]] |accessdate= March 11, 2016 |url= http://www.mtv.com/news/1614819/michael-jacksons-style-legacy-from-military-jackets-to-one-glove/}}</ref>을 한 인물이다. 무대와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이름붙인, [[문워크]]와 복잡한 [[춤]] 동작을 대중화했다. [[대중음악]]에서의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며 [[음악]] 산업을 부각시켰다. 마이클은 여러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는데, [[흑인]]으로는 최초로 흑인/백인 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음악계의 인종 장벽을 무너트려 [[대중음악]]에서 흑백장벽이 무너진 시대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의 뿌리 깊은 병폐로 남아있는 [[인종 차별]]을 완화했다. 그동안 [[스포츠]], [[영화|영화 미디어]], [[정치]], [[법조인]]에 있었던 성공한 흑인을 [[대중음악]]에서 최초로 성공한 [[흑인]]으로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슈프림즈]]나 다른 흑인들이 있다만, 사회적인 인정, 세계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는 마이클이 최초가 맞다.)
 
잭슨 가족의 7번째 자식인 마이클은 [[1964년]] 형제인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그리고 [[말론 잭슨]]과 함께 팀의 막내로 [[잭슨 파이브]]로 데뷔했다. [[1971년]] [[모타운 레코드]]에서 솔로 활동을 시작한 마이클은 1980년대 초 대중음악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1982년]] 앨범 《[[Thriller (마이클 잭슨의 음반)|Thriller]]》의 수록곡 〈[[Beat It]]〉, 〈[[Billie Jean]]〉, 〈[[Thriller]]〉등의 [[뮤직 비디오]]는 인종적 장벽을 깨고, 매체의 예술 형식과 홍보 수단에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디오의 인기는 TV 채널 [[MTV]]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키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융합한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는 흑인=소울/알앤비, 백인=록/팝이라는 공식을 완전히 허물었다는 점에서도 찬사를 받는다. 잭슨의 1987년 음반 《[[Bad (음반)|Bad]]》는 수록곡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마이클 잭슨의 노래)|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Dirty Diana〉]]를 모두 미국 [[빌보드 핫 100]] 싱글의 정상에 올려, 최다 1위 곡을 배출시킨 음반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90년대 동안,〈[[Black or White]]〉와 〈[[Scream]]〉과 같은 영상으로 혁신을 계속했고, 1993년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은 역사적인 무대로 자리매김하였다. 투어를 도는 솔로 가수로서 명성을 쌓았으며 무대와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잭슨은 [[린댄스]]와 [[문워크]] 등 수많은 복잡한 춤 기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그의 독특한 사운드와 스타일은 다양한 음악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이라는악기라는 [[기네스북]] 기록과 함께 마이클의 정규 앨범 《[[Thriller (마이클 잭슨의 음반)|Thriller]]》는 66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ref>[http://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70133-best-selling-album Best selling album]</ref> 총 39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으며<ref name="ASAHI">[http://www.asahi.com/showbiz/music/TKY200907020203.html マイケル記録ずくめ 「最も成功」ギネスが認定], 2009년 7월 2일 작성.</ref><ref name = "Guinness Records 2002 p145–147">Guinness World Records 2002, pp. 145–147</ref><ref name = "Guinness Records 2005 p193">Guinness World Records 2005, p. 193</ref><ref name="uknewsyahoo">[https://web.archive.org/web/20110527045635/http://uk.news.launch.yahoo.com/dyna/article.html?a=%2F14112006%2F344%2Fjackson-receives-world-records.html&e=l_news_dm Jackson receives his World Records], 2015년 확인.</ref>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동안 꾸준히 빌보드 TOP 10 안에 든 유일한 가수로 그의 솔로 경력으로는 총 13개의 빌보드 1위 곡을 남겼으며 밴드 시절까지 합치면 17개의 빌보드 1위 곡을 남겼다.<ref name="MTV">[http://www.mtvjapan.com/news/music/24075 マイケル・ジャクソンが新記録、5つの年代で全米トップ10入り] {{웨이백|url=http://www.mtvjapan.com/news/music/24075 |date=20150402175756 }}, 2014년 5월 작성.</ref> 또한 마이클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13개의 상과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했다.<ref name="Deseret News">[http://news.google.co.uk/newspapers?id=Z04pAAAAIBAJ&sjid=y4QDAAAAIBAJ&pg=3702,4129430&dq=michael-jackson+legend-award&hl=en Grammy moments], 1993년 2월 작성.</ref> 작사/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ref name="songwritershalloffame.">[http://www.songwritershalloffame.org/exhibits/year Through 2010, 401 individuals have been inducted into the Songwriters Hall of Fame] {{웨이백|url=http://www.songwritershalloffame.org/exhibits/year |date=20150924120108 }}, 2010년 작성.</ref>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ref name="dancemuseum.">[http://www.dancemuseum.org/exhibits/hof.html HALL OF FAME INDUCTEES] {{웨이백|url=http://www.dancemuseum.org/exhibits/hof.html |date=20150402122720 }}, 2014년 작성.</ref> 또한 인종차별을 부숴 유색인들의 인권 신장을 이뤘다는 공로로 상을 받았다.<ref name="web.archive.org">{{웹 인용 |url=http://www.cnn.com/2003/SHOWBIZ/TV/03/08/image.awards.ap/ |제목=Image Awards rekindle 'Barbershop' controversy |확인날짜=2006년 6월 2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629060508/http://www.cnn.com/2003/SHOWBIZ/TV/03/08/image.awards.ap/ |보존날짜=2006년 6월 29일 |url-status=live }}</ref> 마이클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사운드로 구성되어 엔지니어들은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612463 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ref>
 
마이클의 외적 변화, 개인적 인간관계, 행동 등 사적인 부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했고 법정 외 합의로 민사소송은 종결됐다.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으며 마이클에게 민사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는 2009년 11월 5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This Is It (마이클 잭슨)|This Is It]]이라는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컴백을 준비하고 있던 중 2009년 6월 25일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했다. LA 경찰은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2급 살인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잭슨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추도식은 각국의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되었다.<ref>{{뉴스 인용 | url=http://news.in.msn.com/national/article.aspx?cp-documentid=5592621 | publisher=MSN | title=Hazarika's funeral creates world record | date=2009년 7월 8일 | 확인날짜=2015년 6월 11일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807110046/http://news.in.msn.com/national/article.aspx?cp-documentid=5592621 | 보존날짜=2014년 8월 7일 | url-status=dead }}</ref> 사망 직후 잭슨을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에서는 정치인 출신이자 목사인 재시 잭슨의 주도하에 국회의원들이 묵념하였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HW2PEr8wEm4&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HW2PEr8wEm4&feature=youtu.be]</ref> 'Global Language Monitor'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지난 수십 년간 유명인들의 죽음 중 가장 큰 반응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고<ref>{{웹 인용 |url=http://www.languagemonitor.com/about/news/michael-jackson-funeral-tops-pope-john-paul-ii-as-no-1-media/ |제목=Michael Jackson funeral tops Pope John Paul II as No. 1 media |확인날짜=2012년 5월 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509070758/http://www.languagemonitor.com/about/news/michael-jackson-funeral-tops-pope-john-paul-ii-as-no-1-media/ |보존날짜=2012년 5월 9일 |url-status=live }}</ref> 2010년에는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에 마이클의 사망이 1위에 올랐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kx86O0jA7kc&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kx86O0jA7kc&feature=youtu.b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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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S]]에 걸린 유명 환자인 라이언 화이트의 죽음과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HIV/AIDS' 연구를 위해 돈을 지원했으며 빌 클린턴은 마이클의 자선 행위를 인정했다. 마이클 잭슨은 빌 클린턴의 취임 갈라쇼에서 'Gone too soon'을 라이브로 불렀으며 'Heal the World'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마이클 잭슨은 가봉과 이집트 등의 아프리카 국가를 방문했는데 그의 첫 번째 방문지였던 가봉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인파들이 모였고 그들 중 일부는 "Welcome Home Michael" 피켓을 들고 인사했다. 1992년 2월 [[:en:National Order of Merit (Gabon)|가봉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ref>{{웹 인용 |url=https://www.lexpress.fr/culture/musique/michael-jackson-l-africain_783922.html |제목=Michael Jackson l'Africain |확인날짜=2021-10-26 |archive-date=2021-1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1019005121/https://www.lexpress.fr/culture/musique/michael-jackson-l-africain_783922.html |url-status= }}</ref> 코르디부아르의 방문에서 황금 왕좌에 앉아 프랑스어와 영어로 된 공식 문서에 서명했다. 추장은 마이클 잭슨을 "King"으로 선포했다.
 
[[1993년]] 1월 31일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미식축구협회인 NFL은 [[슈퍼볼]]의 시청률 하락으로 많은 고심을 했는데 1993년 경기 중간에 마이클이 공연을 함으로 시청률을 올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프타임쇼의 시청률은 [[1992년]] 보다 8.6%나 높아졌으며 이후 하프타임에는 유명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ref>[http://www.hankookilbo.com/v/7e731cb3ca9648819034b553f9370af8 무대 위 12분 공연, 풋볼도 가수도 대박]</ref>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다. 전 세계에서 9,000만 명, 미국에서는 6,000만 명이 시청했는데 시청률은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프로그램 8위를 기록했으며 TV 토크쇼로 한정한다면 역대 1위다.<ref>{{웹 인용 |url=http://www.therichest.com/expensive-lifestyle/entertainment/the-top-10-tv-shows-with-the-biggest-audiences/ |제목=The Top 10 TV Shows With the Biggest Audiences |확인날짜=2015-02-09 |archive-date=2015-02-0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09193106/http://www.therichest.com/expensive-lifestyle/entertainment/the-top-10-tv-shows-with-the-biggest-audiences/ |url-status= }}</ref><ref>[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most_watched_television_interviews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most_watched_television_interviews]</ref> 로스앤젤레스에서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ref name="Deseret News"/>
 
=== 1993-1994 : 1번째 성추행 사건과 1번째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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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는데 표가 빠르게 매진되자 40회의 공연이 더 추가됐다. 공연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75만 개의 티켓은 전부 매진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3/13/0200000000AKR20090313237400070.HTML]</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548883]</ref>
 
== 죽음 ~ 현재 ==
=== 사망 ===
[[파일:Michael Jackson Star.JPG|섬네일|260px|왼쪽|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많은 팬들은 그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꽃을 두고 갔다.]]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주치의 콘레드 머레이가 정맥 주사로 프로포폴을 주사하는 과정에서 기본 투여량보다 과도하게 투약한 것이 원인이었다. 12시 22분 [[911 (응급 전화번호)|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마이클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참고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추후 발표되었다.
 
1시 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되었고, 2시 26분 병원관계자는 마이클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 (응급 전화번호)|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ref>김지방 기자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3063050&code=41131111&cp=nv1 "마이클잭슨 살해 공식 확인"] {{웨이백|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3063050&code=41131111&cp=nv1 |date=20100115060652 }} 쿠키뉴스 2010-01-11 작성</ref>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ref>[http://www.kdjpeace.com/kdj_news_view.asp?idx=1127&gotopage=2&words=&sel= 김대중 전대통령, 마이클 잭슨 사망에 깊은 애도]{{깨진 링크|url=http://www.kdjpeace.com/kdj_news_view.asp?idx=1127&gotopage=2&words=&sel= }},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 2009년 6월 26일</ref> 한국의 [[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민주당]]은 26일 한국의 통일을 기원한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9062616401653224&outlink=1 민주당 "마이클 잭슨, 한국 통일 기원했던 벗"], 2009년 6월 26일 작성.</ref>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마이클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 자살, 슈퍼 박테리아, 피부암, 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ref name="서울신문">[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02601003 마이클 잭슨 부검결과] {{웨이백|url=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02601003 |date=20150209123047 }}, 2009년 10월 2일 작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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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ref>[http://www.cnet.com/news/google-thought-michael-jackson-traffic-was-attack/ Google thought Michael Jackson traffic was attack] {{웨이백|url=http://www.cnet.com/news/google-thought-michael-jackson-traffic-was-attack/ |date=20150619041415 }}, 2009년 6월 26일 작성.</ref>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마이클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미국 내에서 실시간 중계됐으며 총 시청자 수는 3110만명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례식이 됐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7/09/0200000000AKR20090709056000005.HTML 잭슨 장례식, 美 역대 장례식 시청률 3위]</ref> 또한 마이클의 딸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은 아빠는 최고였으며 정말 사랑한다고 추도사를 읽었다. 9월 13일에는 [[마돈나]]가 'VMA'에서 황제여 영원하라며 마이클을 추모했다.<ref name="rollingstonenews">[http://www.rollingstone.com/music/news/read-madonnas-vmas-speech-dedicated-to-michael-jackson-20090913 madonnas-vmas-speech-dedicated-to-michael-jackson-20090913] {{웨이백|url=http://www.rollingstone.com/music/news/read-madonnas-vmas-speech-dedicated-to-michael-jackson-20090913 |date=20150404133859 }}, 2009년 작성.</ref>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 (캘리포니아주)|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전설이 되어 묻히다|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5&aid=0002122623|출판사=|저자=|쪽=|날짜=2009년 9월 4일|확인날짜=2009년 9월 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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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달 'Thriller' 앨범은 [[RIAA]]에서 3000만장 판매(30X platinum)을 인증받았다. 미국 내 최초 3000만장 판매 앨범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ref>{{웹 인용 |url=http://stoo.asiae.co.kr/news/view.htm?sec=enter5&idxno=2015121812502167587 |제목=마이클잭슨 '스릴러' 3000만장 판매돌파 '美최초' |확인날짜=2016-03-11 |archive-date=2016-03-12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12014702/http://stoo.asiae.co.kr/news/view.htm?sec=enter5&idxno=2015121812502167587 |url-status= }}</ref>
 
== 업적여담 ==
=== 영향력 ===
그는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김태훈 음악평론가는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자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됐다고 말했고<ref>[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0500&key=20170512.99002011800 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0500&key=20170512.99002011800]</ref> 박은석 음악평론가는 잭슨이 팝음악계 내부에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인종적 취향의 벽 자체를 아우른 '뉴팝'을 발명했다고 평가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uq3-cThSB_0&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uq3-cThSB_0&feature=youtu.be]</ref> 또 L.A.Reid 에픽 레코드 CEO는 "잭슨의 혁신적인 업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현대의 음악과 예술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ref>{{웹 인용 |url=https://www.bet.com/news/music/2014/03/31/l-a-reid-to-release-new-michael-jackson-album-xscape.amp.html |제목=https://www.bet.com/news/music/2014/03/31/l-a-reid-to-release-new-michael-jackson-album-xscape.amp.html |확인날짜=2017-1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1107030415/https://www.bet.com/news/music/2014/03/31/l-a-reid-to-release-new-michael-jackson-album-xscape.amp.html |보존날짜=2017-11-07 |url-status=dead }}</ref> 영국 연구진이 [[빌보드 핫 100]]에 오른 1만 7천개의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1983년,1991년 총 3차례의 혁명을 맞이했으며 잭슨은 1983년 혁명기를 수놓은 대표적 팝스타로 조사됐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5/06/0200000000AKR20150506153400009.HTML 팝음악 최대 혁명은 91년 힙합 대중화"…빌보드차트 분석결과]</ref> 그리고 2014년 영국 의회에서는 의회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80년간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을 조사했는데 핵 개발, 케네디 암살, 컴퓨터 발명 등의 사건들과 함께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마이클 잭슨의 삶과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선정됐다. (각계각층의 전문가 25명이 80가지 사건을 선정하고 세계 각국의 성인 10,000명이 투표)<ref>[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4/nov/22/80-landmarks-in-80-years-that-shaped-our-world]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4/nov/22/80-landmarks-in-80-years-that-shaped-our-world</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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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3 walk of fame michael jackson.jpg|섬네일|왼쪽|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잭슨]]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telegraph.co.uk/opinion/main.jhtml?xml=/opinion/2003/02/08/do0801.xml&sSheet=/opinion/2003/02/08/ixopinion.html |author=Utley, Tom |title=Of course Jackson's odd—but his genius is what matters |work=The Daily Telegraph |date=2003년 3월 8일 |accessdate=2008년 7월 23일 |location=London |authorlink=Tom Utley |archive-date=2008년 6월 1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80601102016/http://www.telegraph.co.uk/opinion/main.jhtml?xml=%2Fopinion%2F2003%2F02%2F08%2Fdo0801.xml&sSheet=%2Fopinion%2F2003%2F02%2F08%2Fixopinion.html }}</ref>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다.<ref name="ADL">{{웹 인용 |url=http://www.adl.org/PresRele/ASUS_12/2471_12.asp |title=ADL happy with Michael Jackson decision |publisher=[[Anti-Defamation League]] |date=1995년 6월 22일 |accessdate=2008년 7월 1일 |archive-date=2012년 10월 1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21001053852/http://www.adl.org/PresRele/ASUS_12/2471_12.asp |url-status=dead }}</ref> 《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이는데 기여했고,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음악가"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 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ref>{{웹 인용 |url=http://search.bet.com/topics/m/michael-jackson.html |title=Michael Jackson |publisher=Search.bet.com |accessdate=2012년 6월 11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704173546/http://search.bet.com/topics/m/michael-jackson.html |보존날짜=2012년 7월 4일 |url-status=dead }}</ref>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ref name="allmusic_2">{{웹 인용|last=Huey|first=Steve|title=Michael Jackson—Biography|url={{올뮤직|class=artist|id=p4576|pure_url=yes}} |work=AllMusic|accessdate=November 11, 2006}}</ref> 1990년 《[[배너티 페어]]》에서는 연예 공연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로 잭슨을 꼽았다.<ref name = "Nelson George overview 43-44">George, pp. 43–44</ref> 2007년 잭슨은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 걸 안다"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first=Bryan |last=Monroe |title=Michael Jackson in His Own Words |work=[[Ebony (magazine)|Ebony]] |date=December 20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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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위키피디아와 유튜브에서도 잭슨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17.11.12일까지의 누적 데이터 기준, 위키피디아 최다 검색어 순위에서 잭슨은 9,630만 페이지뷰로 가수/밴드 통틀어 1위, 전체 검색어에서는 미국, 트럼프, 오바마, 인도, 2차 세계전쟁 다음으로 6위를 기록 중이다. 또 가장 많이 검색된 앨범 순위에서도 Thriller 앨범이 비틀즈, 에미넴의 앨범과 함께
1,200만 페이지 뷰로 공동 1위, Bad 앨범은 칸예
웨스트의 앨범과 함께 580만 페이지 뷰로 공동
27위이다.<ref>[https://en.m.wikipedia.org/wiki/Wikipedia:Multiyear_ranking_of_most_viewed_pages https://en.m.wikipedia.org/wiki/Wikipedia:Multiyear_ranking_of_most_viewed_pages]</ref> 유튜브에서도 잭슨 콘텐츠 관련 영상은 매달 꾸준히 3억 뷰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최신 인기 가수들과도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치이다.<ref>[https://artists.youtube.com/insights/artist?entity_params_entity=ARTIST&entity_params_id=/m/09889g&hl=ko https://artists.youtube.com/insights/artist?entity_params_entity=ARTIST&entity_params_id=/m/09889g&hl=ko]</ref>
 
== 빌보드 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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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일화를 밝힌 적도 있다.<ref>[https://m.huffpost.com/us/entry/3428237 https://m.huffpost.com/us/entry/3428237]</ref> 토니 스클라파니 음악평론가는 "잭슨은 깜짝 놀랄 정도의 천부적인 노래 실력으로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11살의 나이에 대부분의 성인 보컬리스트들보다도 더한 능숙함과 열정으로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과 같은 빌보드 1위 곡들을 배출했다."라고 평했고<ref>[https://www.today.com/amp/popculture/jackson-changed-course-music-society-2D80556022 https://www.today.com/amp/popculture/jackson-changed-course-music-society-2D80556022]</ref> 가수 레니 크레비츠는 "사람들은 주로 마이클의 경이로운 솔로 커리어를 말하곤 하는데 물론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마이클이 천재성을 가장 유감없이 발휘했던 시기는 어린 시절이에요. 아이였지만 제임스 브라운이나 아레사 프랭클린, 그 어떤 위대한 보컬리스트와도 같은 재능과 소울, 깊이를 가지고 노래했죠."라고 평가했다.<ref>{{웹 인용 |url=http://archives.cnn.com/TRANSCRIPTS/1112/21/pmt.01.html |제목=http://archives.cnn.com/TRANSCRIPTS/1112/21/pmt.01.html |확인날짜=2017-11-05 |archive-date=2021-09-16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916063051/http://archives.cnn.com/TRANSCRIPTS/1112/21/pmt.01.html |url-status=dead }}</ref> 또 레온틴 해스 보컬 트레이너는 "어린 시절의 마이클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정도의 발성 기술이 필요하다. 복성부터 두성, 빠른 발음과 팔세토, 거기에 High G에서 High A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보컬 톤.. 마이클은 확실히 보컬의 모든 면에서 천재적이었다. 마이클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음역대를 이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방법으로 발성 운동과 결합시켰다. 거의 오페라 가수 수준으로. 마이클은 무엇보다도 감정표현에 탁월했다. 저음역대로 노래를 부르다가도 초고음 팔세토로 순식간에 넘어가곤 했는데 이럴 때에도 그의 감정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완벽하게 유지되었다."라고 평가했고<ref>{{웹 인용 |url=http://www.voicecouncil.com/teaching-voice-to-michael-jackson/ |제목=http://www.voicecouncil.com/teaching-voice-to-michael-jackson/ |확인날짜=2017-1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1107011438/http://www.voicecouncil.com/teaching-voice-to-michael-jackson/ |보존날짜=2017-11-07 |url-status=dead }}</ref> 양재영 음악평론가는 "실제로 변성기 이전의 소년 마이클 잭슨은 고음역의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다이애나 로스식의 물 흐르는 듯한 보이스 테크닉을 결합한 독특한 보컬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잭슨 파이브가 1970년대의 포문을 여는 최초의 스타 팝 밴드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보컬리스트로서 마이클의 천재적 역량은.. 특히 'I’ll Be There'는 순수하면서도 혼란스러운 10대의 감성을 마이클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통해 육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아우르며 무수히 양산되는 ‘1970년대식 틴 팝’을 위한 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모타운 시절의 잭슨 파이브를 단순히 10대 취향의 팝 그룹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흑인음악 자체의 맥락에서 평가하자면, 잭슨 파이브는 당시 보컬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오로지 비트만을 강조하던 디스코의 대세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유일한 뮤지션이었다. 마이클의 보컬은 주류 디스코 사운드에 대한 대안일 뿐 아니라 흑인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아프로-아메리칸 가스펠/발라드 전통의 급락을 위한 촉매제 역할까지 하였다."라고 평가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weiv.co.kr/archives/13106/amp |제목=http://www.weiv.co.kr/archives/13106/amp |확인날짜=2017-1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1107005908/http://www.weiv.co.kr/archives/13106/amp |보존날짜=2017-11-07 |url-status=dead }}</ref> 가수 비욘세는 "제가 처음 가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의 첫 프로듀서는 제가 마이클의 'Who's Loving You' 라이브 퍼포먼스를 계속 보게 했어요. 몇 시간이고 계속 반복해서 저에게 보여줬죠. 프로듀서가 원했던 건 제가 마이클의 소울을 느끼길 바랐던 거에요. 정말 그걸 느낄 수 있었죠. 마이클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어린아이였지만 베테랑이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다 큰 성인들보다도 더 감정을 잘 표출했죠. 그건 너무나도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것이었어요. 마치 신이 주신 것 같았죠. 마이클은 제게 때로는 테크닉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을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어요. 마이클은 정말 저를 변화시켰어요. 덕분에 오늘날의 비욘세가 있게 됐죠."라고 관련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ref>[http://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the-juice/6140752/beyonce-tribute-letter-michael-jackson-5-year-death http://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the-juice/6140752/beyonce-tribute-letter-michael-jackson-5-year-death]</ref>
 
성인 시절의 보컬에 대해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잭슨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흑백을 통틀어 역대 팝 보컬리스트 중 열 명 안에 꼽아 억울할 게 없는 인물일 것"이라며 "선율의 기본을 맛깔스럽게 훑어내면서도 때때로 소울풀하게 내지르는 테크닉은 흑인 가수로서 그의 본령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팝 발라디어로서의 능력이라면 더욱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평생 댄스 음악을 달고 다녔던 가수로서는 정말 드물게, 아니 거의 유일하게, 그의 발라드 능력은 동급 대비 최강의 감미로움을 더한다. 각 소절을 각각 다른 느낌으로 미세하게 바꿔 부르는 능력, 가사의 한 결 한 결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전달능력.. 동시대를 살다간 록의 거장들조차 잭슨의 보컬의 위대함은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스릴러 앨범으로 록/팝/소울 부문을 모두 휩쓴 것은 이미 전설이 돼버린 기록일뿐더러 수준급의 록 보컬리스트를 뺨치는 댐핑함, 당대 탑 메탈 보컬리스트들이라도 좌절감을 느꼈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러프한 샤우팅 그리고 'Smooth Criminal'의 기가막힌 팔세토와 'Beat It'이나 'Jam' 등이 들려주는 속도감에 위협받지 않는 탄력적 딜리버리도 록커 잭슨의 포텐셜을 증명한다. 발라드, 댄스, 록을 모두 잘 부르는 가수는, 내 기억이 맞다면, 마이클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 수준은 그 어느 장르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정도였다. 의심할 바 없이."라고 평가했다.<ref>{{웹 인용 |url=https://m.cafe.naver.com/musicy/9289 |제목=https://m.cafe.naver.com/musicy/9289 |확인날짜=2017-08-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29122140/https://m.cafe.naver.com/musicy/9289 |보존날짜=2017-08-29 |url-status=dead }}</ref> 오페라 테너 네일 쉬코프는 "그 어떤 테너도 마이클 잭슨과 같은 수준으로 데시벨이 올라간 적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정말로 질투를 느끼는 부분은, 전대미문의 케이스로, 빠르게 노래하는 동시에 안정적으로 High C를 유지하는 그의 천재성이에요."라고 평가했고<ref>[http://people.com/archive/the-last-word-on-michael-vol-22-no-26/ http://people.com/archive/the-last-word-on-michael-vol-22-no-26/]</ref> Ice J 음향엔지니어는 "마이클 잭슨은 선천적인 미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스릴러 앨범부터 강한 액센트를 사용하고 비브라토를 강하게 사용하는 창법을 유지했다. 이런 창법이 상당히 고난이도인데 지르지 않고 강하게 발음하는 것은 그냥 서서 부르기만 해도 숨이 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cej10&logNo=60104771571&categoryNo=30&proxyReferer=https://www.google.co.jp/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cej10&logNo=60104771571&categoryNo=30&proxyReferer=https://www.google.co.jp/]</ref>
 
세계적인 보컬 트레이너 세스 릭스는 2012년 RTW와의 인터뷰에서는 "마이클은 댄스나 보컬적인 면이나 모두 천재였다. 3옥타브 반을 넘는 음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팔세토를 쓰던 쓰지 않던 모두 연결된 음으로 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재능이다."라고 말했고<ref>[https://www.youtube.com/watch?v=81MQa6u7Hxc&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81MQa6u7Hxc&feature=youtu.be]</ref> 같은 해 배드 앨범 발매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는 "마이클 잭슨은 베이스, 바리톤, 테너 모두 가능했지만 대부분 테너로 노래했다. 마이클이 낼 수 있는 최저음은 베이스 성부의 Low C(가온 도보다 2옥타브 낮은 도, C2)였으며 비브라토까지 섞어서 깔끔하게 High C를 넘어 High G(남자의 3옥타브 솔, G5)까지 낼 수 있었다. 이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3옥타브 반을 넘는 것이었다. 한번은 유럽에 있을 때 마이클에게 전화가 왔는데 마이클은 완벽한 바리톤 음성으로 'Hello~'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서 왜 그런 목소리로 곡을 만들지 않냐고 했더니 마이클은 '저음은 싫습니다, 고음이 좋아요'라고 답했다."라고 관련 일화를 밝혔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cjW8Afn0Jw8&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cjW8Afn0Jw8&feature=youtu.be]</ref> 또 2009년 Urban Spin 인터뷰에서는 "만약 누군가 나에게 그와 함께한 시간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피아노에 앉아 있었고 그는 피루엣(발레의 턴 동작)을 하며 High C를 소리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며 지금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마이클은 피루엣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 그것보다 방금 High C를 내지 않았냐고 어떻게 한 것인지 놀라서 물었다. 그때 마이클은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해보라고 해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NHAoCNrEDSc&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NHAoCNrEDSc&feature=youtu.be]</ref> 가수 존 메이어는 "보컬적으로 마이클 잭슨과 똑같이 부르려고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제 생각에 그건 지뢰밭에 들어가는 거랑 같은 거에요."라고 평가했고<ref>[https://www.usmagazine.com/celebrity-news/news/john-mayer-jackson-memorial-was-unbelievable-200987/amp/ https://www.usmagazine.com/celebrity-news/news/john-mayer-jackson-memorial-was-unbelievable-200987/amp/]</ref> 가수 더 위켄드는 "마이클은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무엇보다도, 보컬적인 면에서 마이클은 항상 저의 영감이 되었죠. 나도 노래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앨범이 바로 'Off The Wall'이었는데 이 앨범을 통해 나만의 팔세토를 찾았어요."라고 평가했다.<ref>[http://www.complex.com/music/2016/01/the-weeknd-explains-how-michael-jackson-was-his-vocal-inspiration http://www.complex.com/music/2016/01/the-weeknd-explains-how-michael-jackson-was-his-vocal-inspiration]</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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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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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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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 어워드 영국 앨범}}
{{전거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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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렬:잭슨, 마이클}}
[[분류:마이클 잭슨| ]]
[[분류:1958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