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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표}}
'''발해'''(渤海) 또는 '''발해국'''(渤海國)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던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해서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신라]] 북부)와 [[러시아]] [[연해주]](현재의 [[프리모르스키 변경주]]) 및 [[하바롭스크 변경주]] 일부 등에 걸쳐 존속했던 다민족 국가다. 발해는 세워지기 전에 [[천문령 전투]] 등에 승리하였다. 원래 국호는 [[진국]](振國)이었으나 713년 발해(渤海)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또 다른 별칭으로는 '''진국'''(振國), '''진단'''(震旦), '''고려'''(高麗)<ref>庚午 帝臨軒 '''高麗'''使揚承慶等貢方物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承聞 在於日本照臨八方聖明皇帝 登遐天宮 攀號感慕 不能默止 是以 差輔國將軍揚承慶歸德將軍揚泰師等 令齎表文幷常貢物入朝 詔曰 '''高麗國王'''遙聞先朝登遐天宮 不能默止 使揚承慶等來慰 聞之感通 永慕益深 但歲月旣改 海內從吉 故不以其禮相待也 又不忘舊心 遣使來貢 勤誠之至 深有嘉尙,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m&levelId=jm_002_0230_0020 속일본기])</ref><ref>甲寅 天皇御中宮 高齊德等上其王書幷方物 其詞曰 武藝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增傾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枝百世 武藝忝當列國 濫摠諸蕃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崖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凶絶問 親仁結援 庶協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郞將高仁義游將軍果毅都尉德周 別將舍航等廿四人 齎狀 幷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賤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還慙掩口之誚 主理有限 披瞻未期 時嗣音徽 永敦隣好 於是高齊德等八人竝授正六位上 賜當色服 仍宴五位已上及高齊德等 賜大射及雅樂寮之樂 宴訖賜祿有差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m&levelId=jm_002_0110_00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북국]]'''(北國), '''[[말갈]]'''(靺鞨)<ref>《[[속일본기]])》요로 4년 정월 병자조 기사, ''遣渡嶋津輕津司従七位上諸君鞍男等六人於靺鞨国, 観其風俗。'' 이 기사에 대해서는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아시와세(粛慎)설과 등이 발해를 가리켰다는 설이 대립 중이다.</ref><ref>{{서적 인용|author=송기호|authorlink=|title=발해 사회문화사 연구|series=|publisher=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year=2011|isbn=9788952111470|page=299}}, ''발해 건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당나라는 713년에 발해에 '말갈을 위로하는 사신'을 보냈다. 또한 발해에 정식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도 '진국'을 사용하지 않고 '말갈'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최흔이 대조영을 책봉하고 귀국한 뒤로부터 '말갈' 대신에 '발해'라 부르게 되었다.''</ref> '''발해말갈'''(渤海靺鞨)<ref>송기호(1988), 〈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 "한국사학" 19 발해말갈(渤海靺鞨)을 하나로 볼지 발해(渤海)와 말갈(靺鞨)로 구분하여 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발해를 말한다고 본다.</ref>, '''[[북적]]'''(北狄), '''해동성국'''(海東盛國), '''대국'''(大國, (<small>[[거란어]]</small>: mos-i gur, 모싀 구르))<ref>契丹文dan gur與〈東丹國〉國號(─兼評劉浦江〈再談“東丹國”國号問題〉──)</ref> 등이 있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스스로를 [[천손|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발해 무왕|무왕]]과 [[발해 문왕|문왕]] 으으으으ㅡ응ㅇ대에 [[당나라|당]], [[통일신라]], [[헤이안 시대|고대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고 교통로를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으며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안정이 이루어졌다. 그 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9세기 중엽 [[발해 선왕|선왕]](宣王)대에 이르러 요동을 점령하였고, 동북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820년쯤 선왕이 [[소고구려]]를 병합했다는 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하지는 않다. 당에선 그때의 발해를 "해동성국"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병합되었다.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고구려]]계 국가인 발해의 유력한 귀족 성(姓)으로 [[횡성 고씨|고]](高)·[[장 (성씨)|장]](張)·[[양 (성씨)|양]](楊)·두(竇)·오(烏)·[[이 (성씨)|이]](李) 6성을 언급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626 |제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해 사회구성 |확인날짜=2020-09-12 |archive-date=2020-11-03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01103004742/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626 |url-status= }}</ref><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10_0050_0030_0010_0010 우리역사넷]</ref> 이들은 원래 한반도 고유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나 송막기문에는 해당 성씨로 기록되었다. [[진위푸]](金毓黻)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의하면 발해 유력귀족 6성 외에 일반 성은 총 49족으로 이중 [[신라]] 계통인 [[박씨]](朴氏)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f>[[노태돈]](盧泰敦) 서울대 교수에 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에서 비롯한 [[신라]] [[진골]] 귀족의 성씨로만 나오는 박씨 성이 [[고려 태조]] 8년과 21년(938년) 각각 1,000호와 3,000호를 이끌고 [[고려]]로 건너온 발해 유민 박어(朴漁)와 박승(朴承)에서 발견되었다.</ref><ref>[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71005/8496601/1 동아A 남-북-러시아 학자들 ‘동북아 고대국가’ 학술회의]</ref> 발해는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굉장히 적어서 아직도 베일에 싸인 면이 많은 나라이며 오늘날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다. 해외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사로 인정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하는 편이다.
 
== 국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