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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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 조직 ====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을 찾아가서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ref name='gjsgcc' /><ref name='"jw-kdr'">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金德齡), 湖節2上-001-1, 光州, 壬辰, 忠勇將</ref>{{sfnp|김세곤|2013|p=331~334}}
 
다음 달 [[음력 7월 10일|7월 10일]] 형 김덕홍이 [[금산 전투|제1차 금산전투]]에서 호남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隆景]의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ref name='gjsgcc742' />{{sfnp|김세곤|2013|p=331~334}}<ref name='"jw-kdh'"> 《[[호남절의록]]》(1799), 김덕홍(金德弘), 湖節1上-046-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ref>
 
[[1593년]](선조 26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경상도 서부를 방비할 장병이 부족해지자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고 [[제2차 진주성 전투]] 과정 및 승전 후 진주 사람 수만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ref name='gjsgcc' /> 8월에는 진주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의(義)로움을 잇다는 [[계의병]](繼義兵)이 일어났다.<ref name='E000323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231 계의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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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등에 다양한 일화가 실려 있다.<ref name='tn국조인물고' />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써서 술기운이 있을 때면 말에 올라 산비탈을 달려 지나가면서 칼을 좌우로 휘둘러서 자르고 달리니,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럽게 쓰러져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하였다. 또 항상 한 쌍의 철퇴(鐵槌)를 차고 다니면서 좌우로 휘둘렀는데, 그 무게가 각각 1백 근이나 되었다. 더러는 말을 달려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날려 말을 거꾸로 타고 나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지붕에 올라가서 몸을 옆으로 하고 굴러 처마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기 전에 몸의 자세를 바꾸어 방으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일찍이 맹호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활을 쏘아 화를 돋구니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삼킬 듯이 하므로, 장군이 창을 빼어들고 맞아 찌르니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매우 많았다.
 
==== 씨름그거 ====
김덕령이 너무 [[씨름|세스]]에 빠져 있자 하루는 그의 누나가오빠가 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남장을여장을 하고 씨름판에하고세스판에 나섰다. 그의 누나는오빠는 마지막 판에 나섰고, 그 누나는오빠는 덕령의 특기인 ‘반들음’을‘그거 올리기’을 피해 그를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덕령은 씨름에서세스에서 처음 진 뒤 씨름판을세스판을 찾지 않고 학문과 무술 익히기에 전념했다.<ref name='gj79s' />
 
==== 논에 물 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