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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했던 [[
▲[[구야국]](금관가야)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읍]])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가야는 당시 중국([[한사군]] 포함), 일본의 소국들, [[마한]], [[동예]], 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신라가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인 [[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왜와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과 왜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다. 왜는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골포국]](창원), [[고사포국]](고성), [[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도움으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백제가 중국 요서와 평양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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