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시각 편집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시각 편집
31번째 줄:
{{한국사}}
 
존재했던 [[구야국한국]]의 고대 국가 연맹체이다. '''가락'''(금관가야駕洛) 왕위를또는 두고'''가라'''(加羅, 구야국왕인伽羅, 迦羅, 柯羅)라고도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되었으며,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읍]])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가야는 당시 중국([[한사군]] 포함), 일본의 소국들, [[마한]], [[동예]], 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신라가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 연맹체이다. '''가락'''(駕洛) 또는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라고도 한다.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에 위치했던 [[변한]]의 [[금관가야]]([[구야국]])를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되었으며, 학계에서는 금관가야가 이끈 가야 연맹을 "'''전기 가야 연맹'''"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후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약화되자 [[5세기]] 경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탄생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경쟁 구도 관계 속에서 압력을 받다가, 532년 신라 [[법흥왕]]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고, 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서 가야 연맹 전체가 멸망하게 되었다.
 
가야왕(王)의 이름은 일본서기에서 나타나는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와 "기본한기",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가야의 왕(王)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간(干, [[카간|Xаан]])"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 전기 가야 연맹 ===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있다. 당초에 [[변한]](弁韓)은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
 
[[구야국]](금관가야)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읍]])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가야는 당시 중국([[한사군]] 포함), 일본의 소국들, [[마한]], [[동예]], 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신라가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인 [[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왜와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과 왜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다. 왜는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골포국]](창원), [[고사포국]](고성), [[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도움으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백제가 중국 요서와 평양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