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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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
[[파일:Beethoven house of birth Bonn 2008.jpg|섬네일|200px|위오른쪽|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탄생지, 현재는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
베토벤은베토벤의 1798년과조부는 1800년21세의 사이에나이에 [[요제프브라반트 프란츠오스트리아 로브코비츠|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small>공국(Joseph현재 Franz벨기에 von플랑드르 Lobkowitz, 1772–1816지역)</small> 공작의 요청으로 첫 [[현악 사중주 1-6번, Op.18 (베토벤)|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을 작곡했다. 그것들은 1801년에 출판되었고 역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그는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Op. 20을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그는 교향곡 [[교향곡 1번 (베토벤)|1번]]과 [[교향곡 2번 (베토벤)|2번]]초연으로 [[요제프 하이든|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에 이어메헬렌 젊은마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세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 음악적 발전, 변조 및 조화의 사용, 감정의 묘사는 모두 그를 그의 영향으로부터 차별화 시켰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일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생겨났던 영향을 고조시켰다.{{sfn|Cooper|2008|p=58}}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1800년 4월 2일 [[부르크 극장]]을 고용하고, [[요제프 하이든|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교향곡 1번 (베토벤)|교향곡 1번]], 그리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후자의 세 작품은 모두 미발표)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일반음악신문''<sub>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sub>''》이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표현한 이 연주회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이 굳이 독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sfn|Cooper|2008|p=90}}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다.{{sfn|Cooper|2008|p=97}}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small>(Ludwig van Beethoven, 1712–1773)</small>이었다.{{refn|"판(van)"은 베토벤의 가족이 [[플란데런]] 지역에서 왔음을, "베토벤"은 [[비트 (뿌리)|비트]] 농장 근교에서 생활했음을 암시한다.{{sfn|Cooper|1996|p=36}}|group=n}}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어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sfn|Cooper|2008|p=407}} 루트비히가 죽기 전에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일종의 음악적 부적으로 그의 손자 루트비히의 방에 걸려있었다. 루트비히는 같은 궁정에서 테너로 고용되어 노래를 불렀으며 때때로 부업으로 건반악기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던 외아들 요한<small>(Johann van Beethoven, 1740–1792)</small>이 있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마그달레나 케베리히<small>(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small>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small>(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small>의 딸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현재 본의 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ref>{{웹 인용|url=https://www.beethoven.de/en/about-us#history|title=Beethoven-Haus History|author=<!--Not stated-->|date=|website=Beethoven-Haus Bonn|publisher=|access-date=16 April 2020|quote=}}</ref>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 세례를 받은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자신도 본인의 생일을 12월 16일로 여겨왔으나 직접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sfn|Thayer|1967a|p=53}}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small>(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small>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ref group="n">베토벤 전기 작가인 알렉산더 휠록 세이어<small>(Alexander Wheelock Thayer, 1817–1897)</small>는 《일곱 개의 바가텔, Op. 33》과 가곡 《여덟 개의 노래, Op. 52》 등으로 추측한다.</ref>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small>(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small>{{sfn|Stanley|2000|p=7}}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요한은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되어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형의 반대를 꺾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한 후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 어린 시절 ===
베토벤은 아버지 요한에게서 처음 음악을 배웠다. 흔히 어린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하며 요한을 가혹한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mall>(Sir George Grove, 1820–1900)</small>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적는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알아차리고, 같은 궁정 동료 등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베토벤의 교육을 맡겼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된 질 판 덴 에덴<small>(Gilles van den Eeden, 1708–1782)</small>, 가족의 후원자인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small>(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small>,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small>Franz Rovantini</small>{{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sub>Franz Anton Ries</sub>{{sfn|Swafford|2014|p=74}}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베토벤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엄격한 교육 방침 안에서 종종 울기도 했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가 침대에서 자고있던 베토벤을 건반 앞으로 끌고가는 일도 있었다.{{sfn|Swafford|2014|pp=22, 32}} 베토벤이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 요한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볼프강]]과 딸 나넬을 어릴 때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것을 보고,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일곱살의 베토벤이 여섯살의 "신동"으로 선전하기도 했다.{{sfn|Thayer|1967a|pp=57–8}}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본에서의 생활<sup>1780–1792</sup> ===
 
==== 베토벤의 교사 ====
[[파일:Christian Gottlob Neefe.jpg|왼쪽|섬네일|크리스티안 네페 (1780년 경, 고틀로브 아우구스트 리베에 의한 초상화)|223x223픽셀]]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small>(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small>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sfn|Solomon|1998|p=34}}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출판작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가 출판된다.{{sfn|Stanley|2000|p=7}}{{refn|[[작품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은 독일의 음악학자 한스 할름과 게오르크 킨스키가 [[WoO]] 번호를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그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는 "WoO Anhang" 번호를 붙였다. 이후 미완성되었거나 짧은 일부 작품들에는 Hess 번호가 또 새로 붙여졌다.{{sfn|Cooper|1996|p=210}}|group=n}} 베토벤은 1782년부터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하다가 1784년부터 궁정 예배당에서 임금을 받는 직원으로 일했다.{{sfn|Thayer|1967a|pp=65–70}} 1783년에 출판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 (베토벤)|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small>(Maximilian Friedrich von Königsegg-Rothenfels, 1708–1784)</small>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선제후"(Kurfürst)라는 부제로 불린다.{{sfn|Thayer|1967a|p=69}}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sfn|Thayer|1921|p=59}} 같은 해에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blockquote>"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sfn|Kerman|Tyson|Burnham|2001|loc=§ 1}}</blockquote>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small>(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small>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임금 약간을 지불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히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에 돈을 대주었다.{{sfn|Cooper|1996|p=50}}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
베토벤은 이 시기 앞으로 도움이 될 될 여러 인연을 만들었다. 폰 브로이닝<sub>von Breuning</sub> 가문도 그 중 하난데, 그곳에서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이닝로부터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앞으로 평생 친구가 될 폰 브로이닝 가문의 약혼자인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small>(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small>도 이 시기 만났다. 폰 브로이닝 집안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던 차에 또다른 가정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 손님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small>(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small>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이 본에서 사는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sfn|Cooper|1996|p=55}}{{sfn|Solomon|1998|pp=51–52}}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sfn|Thayer|1967a|p=121–122}}
 
==== 궁정악단 ====
[[파일:Count von Waldstein.jpg|섬네일|upright=0.8|발트슈타인 백작: 1800년 경, 안토닌 마체크에 의한 초상화|191x191픽셀]]
1785–90년에는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초기 출판물이 끌었던 미지근한 반응과 베토벤 가족의 지속적인 문제 때문일 수 있다.{{sfn|Solomon|1998|pp=36–37}} 그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1795년 빈을 처음 방문한 동안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궁정에서 알콜중독의 결과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sfn|Thayer|1967a|p=95}} 이에 따라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고, 가르치는 일과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가족의 수입에 더 기여했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글루크]], [[조반니 파이시엘로|파이시엘로]]의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인 요세프 라이하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작곡가, 플루티스트,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톤 라이하<small>(Anton Reicha, 1770–1836)</small>와도 친구가 되었다.{{sfn|Thayer|1967a|p=96}}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음)을 작곡했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일련의 변주곡에서 그의 [[교향곡 3번 (베토벤)|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를 확인했다.{{sfn|Cooper|2008|pp=35–41}} 베토벤이 그의 첫 번째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마도 네페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1790년 본의 문학 협회는 선제후에 의해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으로 칸타타, WoO 87을 의뢰하고, 이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 황제 즉위 축하 기념으로 추가로 칸타타, WoO 88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sfn|Cooper|1996|pp=93–94}} 이 두 황제 칸타타는 그 당시에 연주된 적이 없었으며 1880년대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 그리고 그의 음악이 고전주의의 전통과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양식의 예언자로 묘사될 때까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었다.{{sfn|Swafford|2014|pp=107–111}}
 
베토벤은 아마도 1790년 말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의 크리스마스 무렵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sfn|Cooper|2008|p=35}} 그들은 1년 반 후인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본에서 다시 만났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곡(《[[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과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하이든에게 보여준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베토벤은 고데스베르크의 무도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그 당시 베토벤은 나이든 스승과 함께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sfn|Cooper|2008|p=41}}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blockquote>"당신은 오랫동안 좌절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빈으로 갈 것입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2}}</blockquote>
 
=== 빈 – 초기<sup>1792–1802</sup> ===
 
==== 하이든과의 만남 ====
{{참고|베토벤과 그의 동시대인#요제프 하이든|}}[[파일:Beethoven1791.jpg|왼쪽|섬네일|upright=0.8|열아홉 살의 베토벤 (1791년, 작자 미상)|185x185픽셀]]
베토벤은 1792년 11월 프랑스에서 전쟁이 퍼졌다는 소문이 있는 가운데 [[선제후]]의 도움으로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그는 빈에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sfn|Thayer|1967a|pp=34–36}}{{sfn|Cooper|2008|p=42}}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최근 사망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후계자라는 널리 퍼진 감정에 대해, 그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고 뚜렷하게 모차르트적 풍미를 가진 작품을 쓰면서 화답했다.{{sfn|Cooper|2008|p=43}}
 
그는 즉시 작곡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와 연주에 전념했다.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서 그는 [[대위법]]을 마스터 하려고 했다.{{sfn|Kerman|Tyson|Burnham|2001|loc=§ 3}} 그는 또한 이그나츠 슈판치히<small>(Ignaz Schuppanzigh, 1776–1830)</small> 밑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sfn|Cooper|2008|pp=47, 54}} 이 시기의 초기에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주로 이탈리아 성악 작곡 형식에 대하여 이따금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적어도 1802년까지, 그리고 아마도 1809년까지 계속되었다.{{sfn|Thayer|1967a|p=149}}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베토벤은 [[선제후]]에 의해 본으로 귀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도리어 빈에 남는 것을 선택했고,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요한 알브레흐츠베르거]] 및 다른 스승들과 함께 [[대위법]] 공부를 계속 했다. 여하튼, 이 시기까지 1794년 10월에 그랬던 것처럼, 본이 프랑스로 넘어가서 사실상 급료나 복귀의 필요성 없이 베토벤을 남겨둘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고용주들에게는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sfn|Ronge|2013}}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sfn|Cooper|2008|p=53}}
[[파일:Beethoven Riedel 1801.jpg|섬네일|upright=0.9|젊은 베토벤 (1801년, 카를 트라우곳 리델의 초상화)]]
 
==== 연주 활동 ====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sfn|Solomon|1998|p=59}}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sfn|Cooper|2008|p=46}}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sfn|Cooper|2008|p=53}}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refn|이 때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피아노 협주곡 1번 (베토벤)|1번]]인지 [[피아노 협주곡 2번 (베토벤)|2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곡 모두 당시에 작곡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sfn|Cooper|2008|p= 59}}|group=n}}{{sfn|Lockwood|2005|p=144}}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sfn|Cooper|2008|p=59}}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sfn|Cooper|2008|p=56}}
 
==== 유명세를 타다 ====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ref name="Cooper62_5">[[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62–65</ref>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ref name="Cooper68">[[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68</ref>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small>(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small>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ref name="Cooper69">[[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69</ref>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a piano he joked was "far too good for me..because it robs me of the freedom to produce my own tone". (번역 검토 필요)-->라고 말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5119&template=dokseite_digitales_archiv_en&_eid=5055&_ug=Musicians&_dokid=b88&_mid=Written%20documents%20by%20Ludwig%20van%20Beethoven%20and%20others&_seite=1|제목=Letter to Andreas Streicher in Vienna, Preßburg|성=Beethoven|이름=Ludwig|날짜=19 November 1796|출판사=Beethoven-Haus Bonn Digital Archives|언어=독일어|확인날짜=2009-06-28}}{{깨진 링크|url=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5119&template=dokseite_digitales_archiv_en&_eid=5055&_ug=Musicians&_dokid=b88&_mid=Written%20documents%20by%20Ludwig%20van%20Beethoven%20and%20others&_seite=1}}</ref>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ref name="Cooper72">[[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 72</ref>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ref name="Cooper75_6">[[루트비히 판 베토벤#Cooper|Cooper (2008)]], pp. 75–76</ref>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small>(Joseph Johann Baptist Wölfl, 1773''–''1812)</small>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small>(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small>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small>(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small>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sfn|Solomon|1998|p=79}}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8번 (베토벤)|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small>(Barry Cooper, 1949''–'')</small>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ref>strength of character, depth of emotion, level of originality, and ingenuity of motivic and tonal manipulation</ref>
 
==== 음악적 성숙 ====
[[파일:Ölenhainz - Franz Joseph Maximilian von Lobkowitz.jpg|섬네일|왼쪽|롭코비츠 공작: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욀렌하인츠의 초상화|233x233픽셀]]
베토벤은 1798년과 1800년 사이에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small>(Joseph Franz von Lobkowitz, 1772–1816)</small> 공작의 요청으로 첫 [[현악 사중주 1-6번, Op.18 (베토벤)|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을 작곡했다. 그것들은 1801년에 출판되었고 역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그는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Op. 20을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그는 교향곡 [[교향곡 1번 (베토벤)|1번]]과 [[교향곡 2번 (베토벤)|2번]]의 초연으로 [[요제프 하이든|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에 이어 젊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세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 음악적 발전, 변조 및 조화의 사용, 감정의 묘사는 모두 그를 그의 영향으로부터 차별화 시켰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일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생겨났던 영향을 고조시켰다.{{sfn|Cooper|2008|p=58}}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1800년 4월 2일 [[부르크 극장]]을 고용하고, [[요제프 하이든|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칠중주 (베토벤)|칠중주]], [[교향곡 1번 (베토벤)|교향곡 1번]], 그리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후자의 세 작품은 모두 미발표)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일반음악신문''<sub>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sub>''》이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표현한 이 연주회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이 굳이 독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sfn|Cooper|2008|p=90}}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다.{{sfn|Cooper|2008|p=97}}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베토벤)|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Op. 16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피아노와 목관 5중주)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임), [[무치오 클레멘티]]({{llang|it|Muzio Clementi}}, 1752–1832)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의 것들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이 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sfn|Cooper|2008|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