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자열 변경 ({{위키자료집 → {{위키문헌)
거짓편집
태그: 되돌려진 기여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65번째 줄: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인]]으로 [[자 (이름)|자]]는 '''연하'''(蓮下), [[호 (이름)|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ref>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ref><ref>{{웹 인용 |url=http://www.kimkoo.or.kr/02diary/sub.asp?pagecode=m02s01t05 |제목=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확인날짜=2010-02-09 |archive-date=2012-02-08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20208145922/http://www.kimkoo.or.kr/02diary/sub.asp?pagecode=m02s01t05 |url-status=dead }}</ref>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항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반가의 후손<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005224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ref>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ref>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ref>,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ref>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ref><ref>{{서적 인용|제목=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성=김구지음, 신경림 풀어씀|이름=|날짜=|판=|출판사=나남|쪽=245|장=}}</ref>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시|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 시|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 운동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화민국|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이봉창 의거|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남북 협상 이후에는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초대 대통령 선거]] 출마, [[건국실천원양성소]] 창설 등 정치 활동과 민족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후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 [[박정희 정부]] 시절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