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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이빨이 매우 크고 날카롭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졌다. 정진아랑 현재 연애중이다
'''이태준'''(李泰俊, {{문화어|리태준}}, {{본명|이규태|한자=李奎泰}}, 1904년 11월 4일 ~ 1978년)은 [[일제령 조선]]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다. 아호는 '''상허'''(尙虛), 별명은 '''조선의 모파상'''.<ref name=":1">{{저널 인용|제목=이태준론―단편미학의 대가가 보여주는 현실의 단층|저널=문예운동|성=민충환|날짜=2016|호=132|쪽=67-79}}</ref>
 
강원도 철원군 출신.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였다. 이후 가출하여 여러 곳을 방랑하다가 원산 등지에서 객주집 사환 따위 일을 하며 2년여를 보내다 외조모가 찾아와 보살펴주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4년 6월 13일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당하여 퇴학당하고 도일하여 [[조치 대학|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조선문단》에 〈오몽녀〉를 투고, 입선하였으며 《시대일보》에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기자로 입사하여 여러 직책을 두루 지냈으며 학교에도 출강하여 작문을 가르쳤다. 1930년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 1931년 이후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며 문단에서의 교유도 활발하여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를 결성,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는 등 자신의 문학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내었다. 1939년 《문장》의 편집을 맡아 신인추천제도를 도입, [[임옥인]], [[최태응]] 등 작가를 추천하였다.
 
1943년 강원도로 낙향하여 해방 전까지 칩거하였다. 해방 이후 귀경하여 [[임화]], [[김남천]] 등 카프 계열 작가와 어울리며 [[조선문학과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한다. 1946년 돌연 월북, 8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기행》을 쓴다. [[6.25 전쟁|6.25]] 발발 이후 한국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남한측 인사들이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1956년 숙청당한 뒤 항흥 노동신문사 교정원,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 파고철 수집노동자를 지내는 등 갖은 고생을 하였다.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작가로 복귀했으며 김진계의 구술기록에서 1969년 1월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으로서 연도 미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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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이태준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단편문학의 대가라는 말로 수렴된다. 민충환은 "[[김동인]]이 주춧돌을 놓고 [[현진건]]이 갈고 닦은 한국현대 단편소설을 완성한 대가"라고 하였다.<ref name=":1">{{저널 인용|제목=이태준론―단편미학의 대가가 보여주는 현실의 단층|저널=문예운동|성=민충환|날짜=2016|호=132|쪽=67-79}}</ref> 소설의 기교에 관하여 [[김기림]]은 이태준을 "우리들이 가진 가장 우수한 스타일리스트"로 평하였으며, [[최재서]]는 "인간상을 묘출하는 데 ... 명확한 수완을 가진 작가"라 칭하며 "스케치적 필치로 그 인물의 말이나 행동을 점점이 터치하여 가는 동안에 어언간 선명한 인간상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박태원 (1909년)|박태원]]은 "벌써 막연히 일가를 이룬 그 자신의 독특한 예술혼을 가진 극히 존중을 받아 마땅한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ref>{{저널 인용|제목=이태준 소설의 창작방법 연구|성=진보영|날짜=2017|출판사=중앙대학교 대학원|쪽=1-2}}</ref>
 
역사적 현실을 세련된 문학적 기법과 잘 어울려서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초기 소설들은 정갈한 외장이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단면을 예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태준의 예술적 성취는 미적기교가 완숙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후반 작품에서 그 진가를 한껏 발휘한다. 특히 1930년대 말 발표된 〈까마귀〉, 〈복덕방〉, 〈밤길〉 등 작품은 한국 소설문학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월북 후의 작품은 하나같이 남한측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한편, 이를 통해 적극적인 투쟁의지를 고취하는 내용이다. 한국전쟁기의 작품에는 반미적 성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 있다. 북한체제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이태준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서양인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작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북한에서 적극 수용되지 못하였고, 이태준의 숙청과 더불어 북한 문학사에서 사라져버렸다.<ref name=":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