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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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Korea-Ganghwado-Dolmen-02.jpg|섬네일|left|200px|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화도면]]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퇴된 것으로 보아 강화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도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수의 고인돌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 중 하나가 강화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강화도는 [[한강]]의 관문이라는 특성상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접전지중 하나였으며, [[관미성]]의 위치가 강화도 부근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강화도를 [[서해 대도]]라고 불렀다. 백제가 고구려에 패하고 난 후에 강화도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다.이때 강화도는 혈구군, 혹은 갑비고차 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에 귀속되었을 때는 해구군 혹은 혈구진이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강화도는 혈구도라 불리었다.<ref>[[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1권, 문성왕 6년 기사</ref> 신라 후기에는 황해도 남부와 함께 해적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고려|고려 시대]]부터 강화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ref>[[삼국사기]] 잡지 제 4권</ref> [[양광도]] 강화면에 속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벽란도]]의 통로 역할을 했으며, 목판인쇄소, 소금전매소 등이 설치되었고,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는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곳의 목판인쇄소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이 이뤄지기도 했다.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의 왕궁터와 고려시대의 성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 천도 이후 식량의 자급력 향상을 위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을 위해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았다. 개경 환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강화도에서 이어나갔으나, 곧 [[진도 (진도군)|진도]]로 남하했다.
 
{{대동여지도|x=3.0|y=12.7|zoom=11|aspectRatio=1.0|설명=《[[대동여지도]]》}}
 
이후 [[조선|조선 시대]]에는 강화도가 수행하는 국방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태종 (조선)|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활성화와 함께 [[한강]]의 입구로서 진이 설치되고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 (군사)|진]]을 통괄하게 되었다. 강화부사는 경기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우성전]],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권율]] 장군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화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했는데, [[조선 연산군|연산군]], [[조선 광해군|광해군]] 등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군|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다. [[조선 효종|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 (군사)|진]]과 [[보 (군사)|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다. [[숙종 (조선)|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로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다.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파일:FranceGanghwa.jpg|섬네일|180px|강화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조선 후기 [[병인박해]]를 구실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 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강화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함대를 몰아냈다. [[1875년]]에는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고 무덤은 도굴되었다. [[광복]] 후에도 관리 소홀로 군사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섬 내의 성들도 파괴된 정도가 심해서 성의 크기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강화 양민학살 사건|강화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개성에서 피난민이 강화도로 오면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 정화사업으로 몇몇 유적들이 복원, 관리되고 있다. [[2000년]] [[11월 29일]]에는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강화의 고인돌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f>[https://heritage.unesco.or.kr/%EA%B3%A0%EC%B0%BD-%ED%99%94%EC%88%9C-%EA%B0%95%ED%99%94%EC%9D%98-%EA%B3%A0%EC%9D%B8%EB%8F%8C-%EC%9C%A0%EC%A0%81/] [[유네스코]],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ref>
 
== 지질과 지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