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코코슈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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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echlarnKokoschkaHaus.jpg|thumb|right|240px|푀히라룬에 있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생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년]]∼[[1980년]])는 [[오스트리아]]의 [[화가]]이다.이자 [[도나우극작가]]의 푀히라룬에서 태어났다.
== 생애 ==
[[도나우]]의 푀히라룬에서 태어났다. [[1904년]] [[빈]] 공예학교의 급비생으로 수학하는 한편, [[구스타프 클림트]]가 지도하는 '빈 아틀리에'에 들어가서 환상적인 작풍(作風)의 [[판화]]·그림책·플래카드 등을 제작하였다. [[1910년]] 화랑 및 미술잡지 <시투름>의 창립자인 발덴의 초청으로 [[베를린]]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표현주의]] [[사회 운동|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의 제작이 많았고, 그 심리묘사에까지 육박하는 작풍은 대상으로 하는 인물의 운명을 예언한다는 평을 받아 '화필의 점술사'라 불리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후에는 [[1918년]]∼[[1924년]]까지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윽고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중]][[소아시아|근동]] 각지를 편력하여 광대한 시야에 입각한 [[바로크]]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나치]]의 대두로 [[정치]]적인 압박을 받아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곳에서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전란의 유럽을 비판하는 경세적(警世的) 작품을 발표했다. 이런 종류의 제작에는 '[[예술]]은 [[언어]]와 같아서 자아로부터 타아(他我)에의 사자(使者)이다'라는 그의 신념이 구체화되었다. 초기의 환상화로는 <바람의 신부>, [[초상화]]는 <포렐 박사상(博士像)>이 있고, 편력시대의 풍경화에 <몬타나>가 있으며 풍자적 작품인 <테레모피레>는 유명하다. 그는 또한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로서도 주목할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후에는 [[1918년]]∼[[1924년]]까지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윽고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중]][[소아시아|근동]] 각지를 편력하여 광대한 시야에 입각한 [[바로크]]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나치]]의 대두로 정치적인 압박을 받아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곳에서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전란의 유럽을 비판하는 경세적(警世的) 작품을 발표했다.
{{글로벌}}
 
이런 종류의 제작에는 '[[예술]]은 [[언어]]와 같아서 자아로부터 타아(他我)에의 사자(使者)이다'라는 그의 신념이 구체화되었다. 초기의 환상화로는 <바람의 신부>, [[초상화]]는 <포렐 박사상(博士像)>이 있고, 편력시대의 풍경화에 <몬타나>가 있으며 풍자적 작품인 <테레모피레>는 유명하다.
{{토막글|화가}}
 
그는 또한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로서도 주목할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초기 표현주의극의 개척자로서 <불타는 가시밭>(1911)은 극장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은 <살인자, 희망, 여성>과 함께 적나라한 인간남녀의 원존재적 본질을 파헤친 작품이며, 회화(繪畵)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글로벌}}
{{기본정렬:코코슈카, 오스카}}
 
[[분류:오스트리아의 화가]]
[[분류: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분류:1886년 태어남]]
[[분류:1980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