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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大倧敎)는 [[한국]]의 국조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숭배하는 [[한국]]의 [[민족]] [[종교]]이다. 초기에는 '단군교'(檀君敎)로 불렸다.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때였고,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ref name="글로벌_1">대종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현재 [[대한민국]]에 약 50~60만 명의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 60여곳과 [[수도원]] 40여곳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이 [[오기호]], [[이기 (1848년)|이기]], [[김윤식 (1835년)|김윤식]], [[유근]] 등과 함께 단군교를 공표하였는데,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정훈모 (단군교)|정훈모]](鄭薰模)가 내분을 일으켜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나갔다.
 
== 연혁 ==
대종교에 따르면,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노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東京)에서 두일백(杜一白) 노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ref>[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83228&v=42 '삼일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교조 [[나철]](羅喆, 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1월 15일 동지 [[오기호]], [[이기 (1848년)|이기]], [[김윤식 (1835년)|김윤식]], [[유근]] 등 10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絞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ref name="글로벌_1"/>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ref name="글로벌_1"/> [[정훈모 (단군교)|정훈모]](鄭薰模)는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내분을 일으켜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나갔다.
 
[[일본 제국|일제]]가 [[1915년]] [[10월]]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함으로써 대종교를 [[종교]]단체로 위장한 [[한국의 독립운동|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서일]], [[박찬익 (1884년)|박찬익]] 등과 함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고,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등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사 교과서로 지정되기도 했다.<ref>"[[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 박광용, 「대종교 관련문헌에 위작많다 2」, 《역사비평》, 1992</ref><ref name=mbcsay>2004년 2월 9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MBC</ref>
 
1916년 나철이 죽자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민사(神壇民史)》(1904)를 저술한 [[김교헌]](金敎獻)이 제2세 교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ref name="글로벌_1"/>
현재 [[대한민국]]에 약 50~60만 명의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 60여곳과 [[수도원]] 40여곳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1948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量)·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詩敎堂)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글로벌_1"/>
== 연혁 ==
대종교에 따르면,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노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東京)에서 두일백(杜一白) 노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ref>[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83228&v=42 '삼일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대 교주는 [[김교헌]](金敎獻)이다.
 
== 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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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aejonggyo]]
[[ja:大ソ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