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화사별서

하동 화사별서(河東 花史別墅)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는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2019년 11월 14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657호로 지정되었다.[1]

하동 화사별서
(河東 花史別墅)
대한민국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종목유형문화재 제657호
(2019년 11월 14일 지정)
소유조*연
위치
하동 정서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하동 정서리
하동 정서리
하동 정서리(대한민국)
주소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08-1, 정서리 66
좌표북위 35° 10′ 16″ 동경 127° 42′ 26″ / 북위 35.17111° 동경 127.70722°  / 35.17111; 127.70722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개요 편집

이 별서(別墅,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는 조선의 개국일등공신이며, 태조,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1346~1405, 본 평양)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花史 趙載禧, 1861~1941)에 의해 조성되었다.

화사별서는 조선 말기 한양의 상류층이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이라는 건축적 가치, 좋은 기운을 찾아 별장터를 찾아 건물을 배치한 풍수지리적 가치, 박경리의 소설「토지」 최참판댁 모델로서 가지는 문학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고택이다.

역사 편집

화사별서花史別墅(別墅,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조,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1346~1405, 본 평양)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花史 趙載禧, 1861~1941)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 화사 조재희는 가까운 친척의 소개로 국풍(國風, 나라의 풍수를 보는 이)을 대동하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따스한 남부지방에 별장 터를 물색하던 중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화사 조재희는 조선말 흥선대원군과도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 와도 교분이 두터웠고 재산도 상당한 경성(서울의 옛 지명)의 당주동(唐珠洞, 현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거주하는 상류층이었다.

화사별서는 1890년 초반에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1894년)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사 조재희는 화사별서를 안채,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작은행랑채, 초당, 큰 방지(연못)으로 구성하여 재건을 시작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16년에 걸쳐 건축하였으며 목재는 소나무를 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행랑채는 상량에「開國 五百二十年」 「辛亥四月上四日壬甲巳詩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1년에 완공되었고, 안채의 상량에「開國 五百二十七年戊午立柱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8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화사별서는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작은행랑채 별당(초당) 등 일부 건축물이 한국전쟁(1950-1953) 등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채 등에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 가구수법이나, 규모가 가히 하동의 대표적 가옥으로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건축물로 볼 수 있다. 또한 별서 내에 방지, 연정(蓮亭), 취병(翠屛, 비취색 병풍) 등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취병(翠屛)은 ‘비취색 병풍’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울타리로, 조선 후기 조경의 한 형태이며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화사별서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동백나무로 취병을 조성하여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에서 사랑채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화사별서는 하동지역에서 일명 '조부자집'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지정 사유 편집

화사별서(花史別墅)는 화사 조재희(花史 趙載禧, 1861∼1941)가 건립하였다. 안채의 상량문에는 '開國五百二十七年戊午三月初十日午時上樑'으로 적혀 있어 1918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소유자에 의하면 조재희가 이 집을 건립하기 위해 1902년에 착공하여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동에서는 '조 부자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박경리의 소설인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의 배경이 된 고택으로 알려져 있다.[1]

화사별서(花史別墅)는 사랑채 등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채 등에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가구수법이나, 규모가 가히 하동의 대표적 가옥으로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건축물로 볼 수 있고, 조선시대의 풍류적 조원(造園)수법이 잘 적용되어 있어 근대 별장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1]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