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
학익진(鶴翼陣)은 부채꼴 모양으로 적을 감싸는 진법의 하나로 동양과 서양, 옛날과 오늘날 모두 두루 쓰이는 전술의 하나이다.[1]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학익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등의 해전에서 사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
배경
편집학익진은 원래 육전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고안된 진법이다. 조선에서는 이미 문종 시기 편찬된 진법서인 《신진법》에 담아 병사를 훈련하고 있었고[4] 일본에서도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널리 사용된 진법이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5]
이순신은 학익진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길게 한줄로 늘어선 모양의 장사진, 학익진을 뒤집은 모양으로 기습 돌격에 유리한 어린진과 같은 다양한 진법도 수군에 도입하여 적절히 사용하였다.[6]
임진왜란
편집한산대첩
편집한산대첩은 열세의 조선 수군이 우월한 화기와 적절한 전법을 구사하여 일본의 수군을 괘멸시킨 임진왜란 당시 최대 규모의 해전이다. 당시 일본측 병선은 모두 73척이었으며 조선 수군의 학익진을 바탕으로 한 화력 집중에 47척이 파괴되고 12척이 나포되는 괘멸적인 피해를 입었다.[7] 해전 초기 일본 수군은 조선이 학익진을 펼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았는데, 학익진은 측면 공격에 취약하여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실패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5]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부터 수군의 훈련에서 화망을 형성한 집중 포화 전술을 훈련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각종 화기의 사정거리에 대한 숙지와 발사 각도 등에 대한 계산이 필요하였다. 조선 수군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화력 집중점을 설정할 수 있었고, 한산대첩은 훈련해 오던 학익진을 통한 화망 형성이 처음 실전에 사용된 해전이었다. 이 승리 이후 이순신은 화망 형성을 통한 적함 파괴를 주요 공격 수단으로 삼았고 일본 수군을 상대로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3] 조선 수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해전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조선 수군을 경계하였다.[8]
절이도 해전
편집선조 30년(1597년) 7월 이순신이 파직된 사이 수군을 지휘하던 원균은 추원포에서 크게 패하였고 조선 수군은 와해될 지경의 피해를 입었다.[9] 조선 수군은 남해 지역의 재해권을 상실하고 고하도에 새로 수영을 세워 재정비를 시도하였다. 다시 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절이도 해전에서 학익진을 구사하여 한반도 전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고자 하던 일본의 의도를 꺾고 이후 명량해전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10]
거북선의 역할
편집학익진은 측면 공격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적을 포위 공격하려는 의도로 대형이 넓게 퍼진 상태에서 전면의 적에 집중하여야 하기 때문에 옆에서 공격해 오면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수가 방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학익진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학익진의 좌우에 거북선을 배치하였다. 거북선은 접근전에서 적의 조총 공격을 덮개 형태의 장갑으로 방어하면서 사방에 설치된 총통으로 근접 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의 측면 기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또한 전투가 절정에 다달으면 적진으로 돌격하여 근접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에게 큰 피해를 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11]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학익진, 실록위키
- ↑ 강동현 (2019년 8월 5일). “한산대첩과 학익진”. 《경남일보》. 2022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 가 나 이광연, 조선의 산학서로 보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동방학. 제28호, 2013년, 7-42쪽 (36 페이지)
- ↑ 《신진법》을 완성하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8권, 문종 1년 6월 19일 병술
- ↑ 가 나 영화 '한산'속 日 적장은 왜 학익진을 얕봤나, 아시아경제, 2022년 8월 16일
- ↑ 적절한 전투대형 운용, 경남도청
- ↑ 조성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11월 19일에 확인함.
- ↑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하여 전쟁의 판세를 뒤엎다, 우리역사넷
- ↑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리니 원균과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1일 경인
- ↑ 고광섭,〈이순신의 잊혀진 해전 - 절이도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 이순신의 해양전략·전술을 중심으로〉, 《KNST》, 2020; Vol.3, No.2; pp. 075-087
- ↑ 정진술,〈임진왜란 시기 거북선의 기능과 주요 해전〉, 《이순신연구논총》, 제34호,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