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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胡軫, ? ~ ?)은 중국 후한동탁 휘하의 무장으로 는 문재(文才)이며 양주(涼州) 사람[1]이다. 양인 전투에서 예하 장수들과의 불화로 인해 손견에게 패하였다.

호진(胡軫)
성별남성
국적후한
별칭자(字)는 문재(文才)
경력동군태수 → 사례교위
직업장군
관련 활동양인 전투

생애편집

양인 전투편집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원소를 맹주로 궐기하였다. 191년, 원술 부하인 장사태수 손견이 양인(陽人)에 이르렀다.[2] 동탁보병기병 5,000명을 편성해 동군태수[3] 호진을 대독호(大督護)로, 여포를 기독(騎督)으로, 나머지 장수를 도독(都督)으로 삼아 응전하게 하였다. 호진은 성질이 급해 미리 큰소리치길, “모름지기 이번 출정에서 파란 인수(印綬)를 찬 관리를 참해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여포 등 여러 장군은 반감을 가졌다.

양인성과 수십 거리인 광성(廣成)에 도착했다. 은 저물었고 병사와 들은 매우 지쳤기에 마땅히 머물러 취침해야 했다. 동탁으로부터 받은 명령 역시 광성에 묵어 휴식을 취한 후 에 나아가 새벽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포 등은 호진을 싫어해 손견군이 이 일을 망쳐주길 바랐으므로 일부러 ‘양인성의 적들이 벌써 달아났으니 추격해야 한다’고 거짓말하였다. 호진이 쉬지도 않고 바로 진군했으나 성은 방비가 철저해 습격할 수 없었고 피로만 가중되었다.

다른 밤, 호진군은 해자와 보루도 없이 갑주를 벗어 쉬고 있었다. 불현듯 여포 등이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고 외쳤다. 군사들은 온갖 장비도 팽개친 채 요란스레 도주하였다. 십여 리를 가서야 진정되었고 적도 없었다. 날이 밝아 되돌와서는 병기를 수습하였다. 공성을 하려 했지만 성의 수비가 이미 견고해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손견에게 격파되어 도독 화웅 등을 잃었다.[4]

동탁 사후편집

192년, 동탁이 왕윤·여포 무리에게 주살당했다.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던 우보도 죽었다. 그 휘하 이각, 곽사, 장제 등은 사면이 거부당하자 군사를 일으켰다. 왕윤은 온화한 표정도 짓지 않고 호진과 양정더러 “관동의 같은 새끼들이 뭘 하려는 건가? 경들이 가 타일러 불러오시오.”라 하였다. 호진과 양정은 평소 왕윤과의 사이가 나빴기에 그들에게 합류하였다.[1] 호진과 함께 경조윤 신풍현(新豊縣)에서 요격하려던 서영전사하고 이각 등이 장안을 함락해 정권을 장악하였다.[5]

이후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호진은 평소 사이가 나빴던 좌풍익공조(左馮翊功曹) 유은(游殷)을 누명을 씌어 죽였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나 호진은 이 들었고, “를 받는구나, 죄를 받아! 유공조가 귀신을 데려왔어!”라고 중얼거리고는 숨을 거두었다.[6]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실제와 달리 화웅의 부장으로 설정되어 제5회에만 등장한다.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 손견이 사수관으로 진격해온다. 호진은 사수관을 지키던 화웅의 명으로 5,000명을 인솔해 출격했다가 철척사모(鐵脊蛇矛, 철등사모)를 쥔 정보에게 수 합이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

각주편집

  1. 사마표,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6권 위서 제6 동탁에서 인용. 이현 주석,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에서도 인용
  2.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3. 《영웅기》에서는 진군태수라 하였으나 당시 진(陳)은 이 있는 진국이었므로 이현이 후한서에 주석을 달며 인용한 《구주춘추》를 따른다.
  4.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견
  5.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
  6.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배송지 주석, 《삼국지》15권 위서 제15 장기에서 인용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