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질 (조위)
호질(胡質,? ~ 250년)은 삼국 시대 조위(曹魏)의 관료로, 자는 문덕(文德)이며 초국(楚國)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1]
행적
편집어릴 때부터 회수(淮水) 일대에서 장제, 주적과 함께 명성이 있었다.[1] 장제가 별가가 되어 조조에게 호질을 천거하여, 돈구령(돈구현의 현령)이 되었다.[1] 현에서 간통 ·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용의자가 자백하지 않고 도리어 고소한 군리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여 죄를 뒤집어썼다. 호질은 부임하여 자세히 조사하고 사실을 밝혀내었다.[1]
중앙으로 들어가 승상동조의령사가 되었으나, 양주의 요청으로 양주에 남아 치중이 되었다.[1] 장군 장료가 호군 무주와 사이가 벌어져, 양주자사 온회에게 호질을 구했으나, 호질은 무주가 본디 장료와 사이가 좋았음에도 좋게 마치지 못했는데 자신은 무주만도 못하다며 거절했고, 장료는 이에 감동받아 다시 무주와 화합했다.[1]
조조의 초빙으로 승상속이 되었고, 황초 중(222년 ~ 227년)에 이부랑으로 옮겼다.[1] 외직으로 나가 상산태수가 되었고, 동관태수(東莞太守)를 지냈다.[1] 여기에서도 살인사건을 해결했고, 자주 군공을 세웠으나 받은 상은 모두 나누어주어 집에 두지 않았다. 9년 재임 중에 관민이 모두 편안했고, 장졸들도 명령에 복종했다.[1] 태화 2년(228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전장군 만총 등과 함께 동관 공격에 참가했다. 그러나 환성 방면으로 출진한 조휴가 오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깊이 들어갔다 대패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2]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고 진위장군이 더해졌으며 관내후에 봉해졌다.[1] 가화 6년(237년),[3] 포충과 함께 조중을 공격했으나, 오(吳)의 장수 주연(朱然)이 과감히 포충을 공격하니 포충은 패배했고 호질도 물러났다.[4] 경초 원년(238년), 주연이 2만 명을 이끌고 강하군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했다.[5] 정시 2년(241년), 주연은 번성을 포위했다. 호질은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번성의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하여 경병을 꾸리고 속도를 내어 번성의 포위망에 이르러 성을 안정시켰다.[1][5] 이후 정동장군(征東將軍)이 되어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일대의 군사를 장악했고 농업 발전에 전력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아 임지로 가는 곳마다 존경받았다고 한다.[1] 가평 2년(250년)에 가산을 남기지 않고 죽었으며, 100읍의 양릉정후를 죽은 후 받았고, 시호를 정후(貞侯)라 했다.[1]
삼국지연의의 묘사
편집동관(東莞) 태수(太守)로 229년, 오나라의 파양태수(鄱陽太守) 주방(周魴)이 조휴(曹休)를 석정으로 꾀어냈을 때 가규(賈逵)의 지휘 하에 만총(滿寵)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유수로 진군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친척 관계
편집- 호민 (아버지)
- 호질
- 호위 (아들)
- 호파 (아들)
- 호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