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호선생묘

홍명호선생묘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 있는 홍명호선생묘이다. 1986년 5월 22일 안성시의 향토유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홍명호선생묘
대한민국 안성시향토유적
종목향토유적 제33호
(1986년 5월 22일 지정)
위치
안성 일죽면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안성 일죽면
안성 일죽면
안성 일죽면(대한민국)
주소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가리길 124
좌표북위 37° 04′ 59″ 동경 127° 29′ 09″ / 북위 37.08306° 동경 127.48583°  / 37.08306; 127.48583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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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호[洪明浩 1736(영조 12)∼1819(순조 19)] 선생은 본관이 풍산(豊山), 자는 공서(公舒)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아들이며 홍양호(洪良浩)의 동생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47년(1771)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리(校理) · 대사간(大司諫)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정조 11년) · 승지(承旨) · 대사헌(大司憲) · 대사성(大司成) ·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정조 20년(1796)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고,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순조 7년) 등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1807~1810년)이 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1809)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1811)에 이르렀다. 정조 3년(1779)에 동지 겸 사은 서장관(冬至兼謝恩書狀官)으로서 중국에 갔는데, 그가 보고 들은 중국의 풍습 · 부세(賦稅)문제 · 성곽수축과 변경방략 등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정조 15년(1791)에는 그의 아들 홍낙유(洪樂游)가 사관(史官)으로서 처벌당하게 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또 채제공의 천주교 관련에 대해 극악(極惡)한 죄로 논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어 순조 즉위년(1801)에는 정조(正祖)의 능(陵) 축조를 위한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가 공역(工役)을 지연시킨 죄로 삭직(削職)되기도 했다. 글씨를 잘 썼고, 수원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의 전제(篆題)를 썼다. 순조 20년(1820)에 효헌(孝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묘소(墓所)는 현재 안성시 일죽면 가리에 있으며, 비석 2기,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상석 등이 있고, 마을 부근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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