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열 (조선)

조선 중기의 문신

황열(黃悅, 1501년 12월 1일 ~ 1575년 11월 12일[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중흡(仲洽)[1], 호는 정관(靜觀)[1]이다. 황치신(黃致身)의 손자이자 황정욱(黃廷彧)의 아버지이다.

생애 편집

1536년(중종 31) 문과에 급제했으며,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거쳤다.

1538년(중종 33) 성주(星州)의 사고(史庫)에 재변이 있었을 때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제수되어 열성(列聖)의 실록을 새로 마련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쳤다.

1544년(중종 39) 부친상을 당했으며, 삼년상을 마친 후 호조정랑,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치고 1547년(명종 2) 지평(持平)을 겸했다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옮겼다.

이듬해 제용감부정(濟用監副正)으로서 이천도호부사(利川都護府使)로 나갔다가 2년을 넘기고 파직되었으나[2], 이후 서용되어 사예(司藝), 강원도찰방(江原道察訪), 사성(司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거쳤다.[1]

1553년(명종 8) 철원도호부사(鐵原都護府使)로 제수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청으로 체직되었으며[3], 이듬해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로 나갔다.

내직으로 돌아와 봉례(奉禮), 참교(參校),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치고 1559년(명종 14)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했으며[1], 1563년(명종 18) 사복시정(司僕寺正)로 재직 중 사헌부의 청으로 파직되었다.[3]

이후 다시 서용되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도시정(司䆃寺正), 내자시정(內資寺正), 예빈시정(禮賓寺正), 사옹원정(司饔院正),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치고 1571년(선조 4) 우통례(右通禮)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좌통례(左通禮)로 승진하고 1575년(선조 8) 3월 부호군(副護軍)·오위장(五衛將)으로 제수되었으나, 11월 향년 75세로 졸했다.[1]

가족 관계 편집

  • 증조 - 황사장(黃事長)[1] :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황치신(黃致身, 1397년 ~ 1484년)의 차남
    • 조부 - 황섬(黃蟾)[1] : 방답진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 아버지 - 황기준(黃起峻, ? ~ 1544년)[1] :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증 좌찬성(左贊成)
      • 어머니 - 양천현령(陽川縣令) 박집(朴緝)의 딸[1]
        • 부인 - 부사직(副司直) 허용(許墉)의 딸[1]
          • 장남 - 황정식(黃廷式, 1529년 ~ 1592년) : 이조참의(吏曹參議),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 차남 - 황정욱(黃廷彧, 1532년 ~ 1607년) :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증 영의정(領議政), 문정공(文貞公)
          • 3남 - 요절[1]
          • 4남 - 요절[1]

각주 편집

  1. 『황열 묘비명』
  2. 『명종실록』에 의하면 파직된 이유는 다스리는 일을 하리(下吏)들에게만 맡겨서였다고 한다.
  3. 『명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