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구 (조선)

조선의 문신·학자

이서구(李書九, 1754년 9월 14일 ∼1825년 9월 29일)는 조선의 문신·학자이다.

생애 편집

자(字)는 낙서(洛瑞), 호(號)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제자이다.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열두째 아들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으로 영조 때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사관·지평·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795년 정조 때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영해부에 유배되었다가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교정당상이 되어 왕명으로 《장릉지》를 편찬했으며, 1800년 순조 때 호조판서로 지실록사가 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대사헌·대호군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5언 고시에 능했다.[1]

경력 편집

  • 1754년(영종 31년) 9월 14일, 한성부 서부 반석방에서 출생
  • 1774년(영조 50년) 8월, 문과(文科) 정시(庭試)에서 병과 제16인으로 급제
  • 1786년(정조 10년) 2월 3일, 홍문록(弘文錄)에 오름
  • 1787년(정조 11년) 4월, 경상우도 암행어사
  • 1787년(정조 12년) 12월,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
  • 1788년(정조 13년) 1월, 승정원 좌승지
  • 1793년(정조 17년) 8월 4일, 종2품 전라도 관찰사
  • 1796년(정조 20년) 7월, 종2품 형조 참판
  • 1799년(정조 23년) 4월, 이조 참판
  • 1800년(정조 24년) 9월, 정2품 형조 판서
  • 1802년(순조 2년) 2월, 이조 판서
  • 1824년(순조 24년) 9월 22일, 정1품 의정부 우의정
  • 1825년(순조 25년) 9월 29일, 사망
  • 1871년(고종 8년) 3월 16일, 시호 문간(文簡)이 내려짐

가계 편집

  • 고조부, 이곽(李漷), 전평군(全平君)
    • 증조부, 이완(李梡), 밀양군(密陽君)
      • 조부, 이언소(李彦熽, 1706년 ~ ?), 진사
      • 조모, 풍양(豊壤) 조씨(趙氏), 조해수(趙海壽)의 따님
        • 부, 이원(李遠, 1723년 ~ ?), 문과 급제
        • 모, 평산(平山) 신씨(申氏), 신사관(申思觀)의 따님
        • 계모, 진주(晉州) 이씨(李氏), 이한복(李漢復)의 따님
          • 본인, 이서구
          • 아내, 평산(平山) 신씨(申氏), 신경한(申景翰)의 따님

저서 편집

  • 《척재집(惕齋集)》 16권 7책
  • 《강산초집(薑山初集)》 4권 1책

참고 문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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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1. 박제가, 이덕무, 유등공 등은 서자 출신이다. 즉, 이서구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아정유고(雅亭遺稿)》 부록 〈선고부군유사(先考府君遺事)〉에 따르면 이덕무와 수백 통의 서찰을 주고 받았으며, 이덕무가 먼저 죽자 그 아들에게 (문집 간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 모든 서찰을 정리하여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