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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준(高羲駿, 일본식 이름: 高島基, 1880년 11월 ~ ?)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단체 국민협회 간부를 지냈고, 일제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에 참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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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경기도 경성부 출신이며, 본적은 경성부 황금정이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관료로 근무하여 거제군진남군, 충청남도 신창군의 군수를 지냈다. 거제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거제군 최초의 근대 교육 학교인 거제보통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고희준이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이용구일진회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이완용 계열의 국민연설회에 참가하면서 이용구와 결별하고, 이완용과 조중응 쪽으로 돌아섰다. 당시 같은 친일파인 이용구와 이완용은 “합방 청원 운동”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일진회가 해산된 뒤에는 정우회를 발기하여 참여했고, 그해 그는 연설을 통해 한일 병합의 당위성을 전달하는 국시유세단에도 가담했다.

그 뒤로 고희준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을 국민협회 간부로 보냈다. 국민협회는 1920년 총독부가 민원식의 협성구락부를 개편하여 조직한 단체로, 그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192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3·1 운동 이후 고조되는 독립 운동 분위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독립이 실현되면 조선민족은 과연 행복할까〉는 논설을 싣는 등 친일 활동에 전념함으로써, 중추원에 포함되는 포상을 받기도 했다.

국민협회와 함께 보천교의 친일 단체인 시국대동단조선대아세아협회의 간부를 지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에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 《매일신보》에 창씨개명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 당시 그는 황민화 사상 전파를 위한 신도연구회와 조선인 자본가 중심의 친일 단체 동민회에도 직함을 갖고 있었다.

사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