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원군
광주원군(廣州院君, ? ~ 945년 이후)은 고려의 왕자이다. 태조(太祖)와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의 아들이다. 성은 왕(王)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광주원군
廣州院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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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왕자 | |
이름 | |
휘 | 미상 |
신상정보 | |
출생일 | 900년 |
사망일 | 945년 이후 |
부친 | 태조 |
모친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배우자 | 미상 |
생애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태조 왕건의 아들로, 어머니는 경기도 광주 출신의 호족 왕규의 딸인 소광주원부인으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은 왕, 본관은 개성이다. 이름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왕규의 난
편집945년(혜종 2년), 외조부인 왕규가 혜종을 죽이고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혜종의 침소에 자객을 보냈으나, 혜종이 자객들을 직접 때려 죽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혜종은 이 일을 불문에 붙였다. 이후에도 왕규는 혜종의 침소에 자객을 또 보냈으나, 혜종은 최지몽의 예언을 듣고 자리를 피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 왕규는 혜종이 죽더라도 왕요(훗날 정종)와 왕소(훗날 광종)가 있어 광주원군이 보위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혜종에게 두 사람을 참소하였으나[1], 혜종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해 음력 9월 왕규는 왕요와 왕식렴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한 후 참수되었다(왕규의 난).[2][3][4].
다만 이 왕규의 난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그 해석이 엇갈리기도 하며[5][6], 왕요와 왕식렴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반란을 왕규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는 왕규가 광주원군을 보위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시각에 기인한 것으로, 광주원군이 적통도 아닐 뿐더러, 이는 태조의 유훈인 훈요십조와도 어긋난다. 또한 광주원군이 보위에 오를 경우 반발할 수많은 호족들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왕규가 광주원군을 보위에 올리고자 했다는 것은 왕요 일파가 왕규를 죽이기 위해 억지로 붙인 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7].
최후
편집《고려사》〈열전〉에는 광주원군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생몰년이나 무덤에 관한 기록도 없다. 호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이다[3].
한편 사학자 김창현은 자신의 저서 《광종의 제국》을 통해, 왕규의 난 당시 왕규를 역적으로 규정한 정종, 광종 형제에 의해 광주원군도 함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왕규 뿐 아니라 광주원군도 반역자로 규정을 해야 정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8].
가족 관계
편집광주원군이 등장한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출처
편집- ↑ 이한우 (2012년 8월 30일).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21세기북스. 49 ~ 50쪽. ISBN 9788950939014.
- ↑ 《고려사》권2〈세가〉권2 - 왕규가 역모죄로 처형당하다
- ↑ 가 나 《고려사》권90〈열전〉권3 - 종실 - 태조 왕자 광주원군
- ↑ 《고려사》권127〈열전〉권40 - 반역 - 왕규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왕규〉항목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왕규의 난〉항목
- ↑ 박영규 (2000년 3월 25일). 《(증보판)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13 ~ 117쪽. ISBN 8975271544.
- ↑ 김창현 (2003년 1월 3일). 《광종의 제국》. 푸른역사. 118쪽. ISBN 9788987787664. 2016년 6월 4일에 확인함.
- ↑ SBS《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홈페이지 등장인물 소개 - 10황자 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