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한양도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사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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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光熙門, 영어: Gwanghuimun[1])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간문 중 하나로 남동쪽에 위치했다. 이름의 '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2] 내수구인 청계천과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일제강점기 당시 시민들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3] 근대부터 남소문(南小門)으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조선 전기의 남소문과는 무관하다.[주해 1]

복원된 광희문의 모습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역사편집

 
대동여지도 중 도성도에 광희문 부분이 흰 박스로 강조되어 있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4] 이때 흥인지문과 함께 목멱산타락산 사이에 건축되었고, 남소문동천과 개천(開川)인 청계천이 만나는 이간수문 남쪽에 위치하였다. 목조 문루는 단층에 전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꼴로 건축되었다. 일반 백성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왕이 광희문을 사용한 경우는 병자호란 때 왕이 가마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피란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록된 바가 없다.[5]

전란을 거치며 숭례문흥인지문을 제외한 한양도성의 문루는 모두 소실된다. 숙종영조는 소실된 문루를 다시 건축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문루가 세워진 것이 광희문이다. 숙종 37년인 1711년에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을 것을[改設]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광희문의 관리를 담당하던 금위영이 2월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이때 숭례문과 흥인지문처럼 중층으로 하지 않고 남한산성의 문을 선례로 단층으로 짓기로 계획한다.[6] 이로써 이듬해 4월 11일까지 육축 9칸을 다시 쌓아 문짝을 달았는데 홍예문으로 했다. 그러나 문루는 목재를 충분히 마련한 후에 재건하기로 하고 이때까지 마련한 목재는 돈의문의 재건에 사용하였다.[5][7] 1719년(숙종 45년) 1월 25일에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며,[8] 2월에는 편액을 새로 걸었다.[5] 단청은 영조 20년인 1744년에 칠한다.[9]

일제강점기에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루 여장이 무너지고, 걸인들이 근처를 배회하는 등 위생상의 문제도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28년에 고적보존회는 자금 부족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혜화문과 함께 문루를 철거하였다.[10] 육축은 철거하지 않고 6.25 전쟁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1966년에 퇴계로의 확장을 위해 철거가 재논의 되었음에도 결국 유지하기로 결정한다.[11]

1975년에는 퇴계로와 왕십리를 잇는 간선도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섬처럼 도로 한 가운데에 있던 것을 남쪽으로 12m[주해 2] 옮겨 다시 복원했다. 복원 시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하였다.[13] 이때 현판은 김응현이 썼다.[14] 2014년 2월 17일에는 39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며,[11] 같은 해 4월에는 구청에서 관광객이 2층 문루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광희문성곽코스'를 선보였다.[15]

용도편집

간문편집

한양도성의 문은 정문과 간문으로 구분했는데, 광희문은 간문에 속하였다. 이에 따라 사신을 환영할 때 사대교린의 원칙에 따라 교린의 관계인 일본 사신들은 간문인 광희문을 통과해 도성에 들어왔다.[16] 뿐만 아니라 개폐 절차와 입직군사에도 차이가 있었다. 정4품인 호군과 30인의 수문병이 근무하던 정문과는 다르게 광희문에는 종6품인 부장 2인과 수문병 10명이 문을 지켰다.[17][18] 개폐의 절차도 달랐다. 선전표신과 부험이 모두 필요한 정문과는 다르게 간문이었던 광희문은 개문표신만으로 열었다. 그러나 문을 계속 열어두어야 하는 날에는 광희문에도 선전표신이 갔다.[19]

시구문편집

 
광희문 외부 신당리 내지인 공동묘지 일원.

도성 내부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고,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사소문(四小門)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인 까닭이다. 따라서 광희문으로 시신이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왕의 친척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빈 김씨, 명온공주, 희빈 장씨의 장례행렬이 광희문을 통과했다. 능(陵)을 제외하고 동쪽에 위치한 원(園)과 묘(墓)로 향할 때 이 문이 사용된 것이다.[16] 백성들의 발인행렬도 이곳을 통과했다. 심지어 광희문 바깥은 금표여서 묘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도교 부근과 함께 무덤이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20]

이런 연유로 시신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는 의미의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이명이 붙여졌다.[5] 광희문은 부정한 문, 즉 부정문(不淨門)으로 취급되기도 하여 한양도성의 문을 부를 때 이 문을 제외하고 8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1]

고종 연간에는 광희문 외곽 구릉지에는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1902년에는 일본인을 위한 화장터가 생기고, 신당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5] 가난한 하층민들이 여기에 불법 건축물을 지어 거주하기도 하였다.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움막을 지어 아편굴을 만드는 사례도 나타났다.[22]

1907년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바깥에 버려진 모습이 프랑스 〈릴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리기도 하였다.[23] 이 때 광희문 바깥에 놓인 시신은 총 60구로, 친척이 찾아오지 않은 시신은 모두 광희문 바깥 묘지에 묻었다.[24]

가톨릭 성지편집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는데, 이 때 친지를 찾지 못한 시신들은 당시 시구문이었던 광희문을 통과해 바깥에 버려졌다. 총 순교자 중 794명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졌는데 그중 54구는 신유박해(1801)에서 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구는 병인박해(1866)에서 기묘박해(1879)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25] 특히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여기 묻히고 유기된 것으로 추정된다.[26][27]

이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9년 5월에 현양탑을 설치하고, 2008년 4월에는 제대를 설치하였으며 2014년 8월에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했다.[27][28]

사진편집

주해편집

  1. 《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2. 15m로 알려져 있었지만 12m가 정확하다.[12]

각주편집

  1. Administration, Cultural Heritage. “Hanyang City Wall, Seoul - Heritage Search” (영어).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2.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한양도성박물관》. 2022년 5월 15일에 확인함. 
  3. “100년 전 서울 풍경,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 《경향신문》. 2022년 1월 20일. 2022년 5월 11일에 확인함. 
  4. 《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국사편찬위원회, 위키문헌
  5.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서울역사박물관.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6. 승정원일기 459책 (탈초본 24책) 숙종 37년 3월 14일 계묘 26/29 기사(1711년)
  7. 《숙종실록》 50권 37년 6월 3일, 수구문을 개설함으로 인해 돈의 문루를 조성하다. 국사편찬위원회
  8. 《숙종실록》 63권 45년 1월 25일, 책문 후시를 허락치 않다. 온 가족이 여역에 몰사한 호마다 곡식 1석씩 주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9. 승정원일기 976책 (탈초본 53책) 영조 20년 8월 27일 신미 60/60 기사 (1744년)
  10. 오백년의역사가진 동소,수구양문철훼, 《동아일보》, 1928.07.12.
  11. 중구, 17일 시신 내보내던 광희문 39년 만에 개방, 《세계일보》, 2014.02.11.
  12. 하미옥. "서울 한양도성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의 위상." 국내석사학위논문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2016. 서울
  13. “광희문(光熙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5월 15일에 확인함. 
  14. 광희문 복원준공, 《경향신문》, 1975.11.17.
  15. 광희문ㆍ정동 문화탐방코스 첫선, 《시민일보》, 2014.04.08.
  16. 하미옥. "서울 한양도성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의 위상." 국내석사학위논문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2016. 서울
  17. 법제처 (1967). 〈병조, 형조〉. 《(국역)육전조례》. 94쪽. 
  18. 대전회통》 4권, 兵典 啓省記
  19. 한국법제연구원 (1995). 《(국역)육전조례》. 243쪽. 
  20. 비변사등록정조 10년 1786년 4월11일(음)
  21. “九門의舊態와新容 (一)”. 동아일보. 1928년 4월 19일.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22. “光熙門外殺人阿片窟 今年內에만十餘名을誤殺”. 동아일보. 1928년 10월 12일.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23.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 입수”. 2021년 2월 15일에 확인함. 
  24. “死卒掩土”.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7일. 
  25. 서종태, "광희문성지의 실체 규명과 순교자 영성", 《제1회 광희문성지 학술심포지엄》, 2017년 11월 25일
  26. “광희문 성지는 한국의 카타콤바”. 《가톨릭 평화방송》.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27. “[교황 방문지]서소문 순교 성지…시복 124위 중 27위 순교”. 2014년 8월 9일.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28. “성지/사적지 목록 > 서울대교구 > 광희문 성지”. 《GoodNews 가톨릭정보》. 2020년 12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