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연구평의회

국가연구평의회(독일어: Reichsforschungsrat; RFR 라이히스포어슝스라트[*])는 1936년 독일에서 항공 분야를 제외한 모든 기초연구 및 응용연구의 중앙집권적 계획을 목적으로 교육부 산하에 설치한 기관이다. 1942년 재조직되어 군수탄약부 산하로 이동되었다.

결성 편집

에리히 슈만의 구상에 따라 1937년 3월 16일 국가과학교육문화부 산하에 국가연구평의회가 설치되었다. 당시 교육국가장관은 베른하르트 루슈트였다.[1] RFR은 항공 분야를 제외한 독일의 모든 기초연구 및 응용연구의 중앙집권적 계획기관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항공 기술은 항공부 장관 헤르만 괴링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제외되었다. 1937년에서 1940년까지 초대 평의회 의장은 육군무기청(HWA) 청장이자 베를린 공과대학교 방위기술학부 학장이었던 카를 하인리히 에밀 베커 포병대장이었다.[2][3] 1940년 베커가 사망(게슈타포에게 자살당했다)한 뒤 교육국가장관 루슈트가 RFR 의장을 겸했다.[4] 하지만 실무는 독일 연구협회 회장 루돌프 멘첼이 전담했다.[5]

당시 대표적인 평의원으로는 다음 사람들이 있다.[6]

  • 쿠르트 디프너 - 튀링겐 슈타틸름에 소재한 RFR 핵물리학 실험장 책임자. 고토프에 소재한 HWA 실험장 관리관.
  • 아브라함 에자우 - 1937년에서 1943년 말까지 물리학 부서장 역임. 1942년에서 1943년까지 핵물리학 전권대사, 이후 고주파물리학 전권대사.[7]
  • 발터 게를라히 - 에자우의 후임 물리학 부서장 및 핵물리학 전권대사(1944년 1월 1일 이후).
  • 베르너 오젠베르크 - 1943년 6월 29일에서 1945년 사이 RFR 계획기획단 책임자. 약 5천 명의 과학자 및 공학자들을 전선에서 빼와서 연구 및 개발에 종사하게 함. 종전 시기 그 수는 1만 5천 명으로 늘어남.[8]
  • 오토 셰르처 - 레이다 부서장 (1944년-1945년)
  • 에리히 슈만 - 폭발물리학 전권대사 (1942년-1945년)
  • 페터 아돌프 티센 - 화학 및 유기물질 부서장.

재조직 편집

1942년 6월 9일, 아돌프 히틀러는 RFR을 군수탄약부 산하 기관으로 재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괴링을 의장으로 앉혔다.[9] 이 재조직은 당시 군수탄약국가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슈페어는 RFR이 교육장관 루슈트의 산하에 있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본 목적 달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10] 괴링은 항공 부문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듯이 RFR도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을 기대하고 의장에 임명되었다. RFR의 의제를 설정하기 위한 회합이 1942년 7월 6일 소집되었다. 이 회합은 국민사회주의의 과학에 대한 태도의 전환점이었다. 이 때 유대계 과학자들을 독일에서 축출한 것이 실수였다는 인식이 이루어졌다. 1933년에 이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 막스 플랑크가 히틀러를 만나 유대계 과학자들을 추방하면 그들의 실력이 외국에 보탬이 될 것임을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플랑크의 말을 듣지 않고 쫓아냈었다.[11][12][13]

각주 편집

  1. Document 52: Creation of a Research Council, 16 March 1937 in Hentschel, 1996, 145-145.
  2. Macrakis, 1993, 90-91.
  3. Burghard Ciesla Abschied von der „reinen” Wissenschaft: „Wehrtechnik” und Anwendungsforschung in der Preufiischen Akademie nach 1933 in Die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1914-1945 (Akademie Verlag, 2000[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83-513.
  4. Macrakis, 1993, 91.
  5. Hentschel, 1996, Appendix B; see the entry for RFR.
  6. Hentschel, 1996, Appendix B; see the entry for RFR. Also see the entries in Appendix F for Diebner, Esau, Gerlach, Osenberg, Scherzer, Schumann, and Thiessen.
  7. Dieter Hoffmann Between Autonomy and Accommodation: The German Physical Society during the Third Reich, Physics in Perspective 7(3) 293-329 (2005) pp. 305.306.
  8. Macrakis, 1993, 94.
  9. Document 98: The Führer’s Decree on the Reich Research Council, 9 June 1942, in Hentschel, 1996, 303.
  10. Read Samuel Goudsmit’s account and interpretation of the role of the RFR in Document 111: War Physics in Germany, January 1946, in Hentschel, 1996, pp 345-352.
  11. Document 114: Max Planck: My Audience with Adolf Hitler in Hentschel, 1996, 359-261.
  12. Document 99: Record of Conference Regarding the Reich Research Council, 6 July 1942, in Hentschel, 1996, 304-308.
  13. Macrakis, 1993, 91-94.

참고 자료 편집

  • Hentschel, Klaus, editor and Ann M. Hentschel, editorial assistant and Translator Physics and National Socialism: An Anthology of Primary Sources (Birkhäuser, 1996) ISBN 0-8176-5312-0
  • Macrakis, Kristie Surviving the Swastika: Scientific Research in Nazi Germany (Oxford, 1993) ISBN 0-19-507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