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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金範禹[1], 1751년 5월 22일 ~ 1787년 9월 14일)는 한국 천주교 첫 희생자이다. 세례명은 '토마스'로 1751년 5월 22일(영조 27년 음력 4월 27일) 한성부 명례방(現 서울 명동)에서 태어났다. 1773년(영조 39년) 역관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가 되었다.

김범우
출생1751년 5월 22일
한성부 명례방
사망1787년 9월 14일
밀양 삼랑진
사인고문 형벌 악화
매장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
북위 35°26′03″ 동경 128°50′20″
성별남성
국적조선의 기 조선
별칭세례명 토마스
직업역관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부모父 김의서(경주 김씨), 母 남양홍씨

을사추조적발사건편집

천주교 집회 장소 제공편집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베이징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중국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던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반도 땅에 천주교회가 세워졌다. 김범우는 천주교회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가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이 교회가 되어 명례방공동체가 생겨났다.

적발편집

1785년 3월 명례방의 자기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형조)에 발각된다.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양반들이어서 방면되었지만, 그는 교회 집회 장소를 제공한 집주인에다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어 고문과 형벌을 받고 밀양 단장으로 유배되었다. 처연한 신세가 되어 그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귀향된 후에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의 기록에는 전해진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혹독한 매질의 여독으로 2년 동안 고생하다가 1787년 9월 14일 고문을 받은 상처의 악화로 귀천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량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김범우의 묘편집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에 있다.

1985년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과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바친 마백락 씨 등은 1989년 극적으로 후손의 외손 중 한 명을 만나 김범우의 묘로 지적해 준 묘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김범우의 묘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김범우의 묘소는 이 곳 만어산 중턱에서 발견하게 됐고 그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군은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 대사, 휴정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재약산(858미터)의 표충사와 만어산(670미터)의 만어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찰(古刹)이기도 하다.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기념 성모동굴성당편집

성모동굴성당은 김범우 묘역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1번지에 99평 200석 규모로 2011년 9월 20일 봉헌되었다.

각주편집

  1. 프랑스인 클로드샤를 달레가 저술한 《조선 교회사》에서는 ‘Kim Pem-ou’로 표기하고 있다. 클로드샤를 달레 (1874).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Volume 1》.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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