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저 (조선)
김저(金䃴, 1509년 ~ 1547년[1])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학광(學光)[1],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세필(金世弼)의 아들이다.
김저
金䃴 | |
조선국의 성균관 지평 | |
임기 | 1542년 ~ 15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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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중종 이역 인종 이호 명종 이환 |
섭정 | 동궁 세자 이호(대리청정) 의정부 영의정 홍언필(대리청정) 대비 문정왕후 파평 윤씨(수렴청정) |
신상정보 | |
국적 | 조선 |
출생일 | 1509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경주 |
사망일 | 1547년 (39세) |
사망지 | 조선 함경도 삼수에서 사사(사형)됨.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본관 | 경주(慶州) |
학력 | 1539년 별시문과에 을과 급제 |
경력 | 조선국 성균관 검열(1539년 ~ 1540년) 조선국 성균관 교리(1540년 ~ 1542년) |
정당 | 무소속 |
부모 | 김세필(부), 경주 이씨 부인(모) |
친인척 | 이탁(외조부) |
별명 | 자(字)는 학광(學光)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
종교 | 유교(성리학) |
웹사이트 | 김저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생애편집
1536년 음서로써 문관 관직에 천거된 그는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을과 급제하였고 중종 임금이 붕어한 이후에도 인종(仁宗) 임금과 명종(明宗) 임금을 섬겨 관직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원로대신 윤임을 축출하고 득세한 권신 윤원형 등의 모함을 받아 의금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안동(安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6월 고성(固城), 8월 삼수(三水)로 이배되었다가 또 이듬해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향년 39세.[2][1]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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