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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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최씨(羅州 崔氏)는 탐진 최씨(耽津 崔氏)에서 분적된 본관으로 시조는 조선(朝鮮) 시대의 최택(崔澤)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탐진 최씨의 시조 최사전(崔思全)의 원손(遠孫)이기도 하다.

최부 금남선생행록;원작자 眉岩 유희춘

금남선생(錦南先生)최공(崔公)의 휘(諱)는 부(簿)요, 자(字)는 연연(淵淵)이며 나주태생이고 탐진인(耽津人)으로서 장경공(莊景公)의 후예인 바, 진사(進士)휘 택(澤)의 아들이다.그는 타고난 재질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다방면에 정통하였고 영민(怜敏)하였다.

장성하여 치세경륜(治世經倫)에 능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을 잘지었다. 나이 24세때 진사제삼(進士第三)에 합격하였고 29세때 즉 성종3년(1482)봄에 시행한 알성과(謁聖科;임금이 친이 보이는과거)에 정통책(正統策)이라는 과제로써 제三에 등제(登第)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사생(上舍生)으로 성균관에 있게 되었고 그때 재명(才名)을 크게 떨첬으며 신종호(申從護)등과 교우하였다. 초임에 조정에 출사하게된 그후 여러 관직을 거처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또 공의 저론(著論)일백수십편은 그 논리가 명백하고 정확하여 당시의 평론에서 추앙을 받은 바되어 병오년(1486)에는 중시(重試;과거에 이미 급제한 자를 특별우대하기 위한 과시)의 아원(亞元)에 등제하였다.이로부터 사헌부 감찰에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기고 곧 수찬으로 승진되었으며 정미년(丁未年)에는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다.

당년9워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각도의 政務검사관)의 임무를 띠고 제주에 갔는데 이듬해인 무신년 윤정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듣고 황망히 도해(渡海)하다가 폭풍을 만나 중국 대주(절강성)에 표착되었다가 그해 6월에야 환국하여 한양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였다. 그때 주상(主上)의 명령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지어 오렸다.

그후 연이어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임자년(壬子年,1492)면상(免喪)된 뒤에 간관(諫官)인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앞서 주상의 명령에 의해 찬술된 표해록이 과실이라 논박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주상께서는 이 사태를 심상치 않게 여겨 친히 선정전(宣政殿)에서 공을 일견하시고 표해당한 전말을 하문하니 상세히 아뢰었던 바, 주상께서 그 시종(始終)을 듣고 찬탄하면서 말씀하시기를 『공은 사지(死地)에서 허덕이면서도 국위를 선양하는데 진력하였도다.』하시고 의복한벌을 하사하시었다.

이해에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에 다녀왔으며 계축(癸丑)년 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에 四월에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은 또다시 앞서 이썼던 트집을 거론하니 옥당(玉當)의 여러학사(學士)들은 주상께 아뢰기를『최부(崔簿)는 연상(連喪)四년에 한번도 집에 가지 않고 려막(廬幕)에서만 수상(守喪)한 효행의 극진함은 가상할만하니 동료들과 재임할수 있게 하여주십시요』라 하였다.

성종(成宗)은 공경(公卿)들과 의논한뒤 그대로 재임케 하였다.

五월에 병으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떠났다가 갑인년(1492)五월에 다시 홍문관교리로 복직하였고 八월에는 부응교(副應校)겸. 예문관응교(藝文官應校)로 승진되었다. 예문관응교에의 등용은 파격적인 것이며 장차 문형(文衡;大提學의 별칭)의 재목이 아니면 오룰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을묘년(1495)봄에는 생원회시(生員會試)의 참고관(參考官)이 되었는데 명참고관으로 알리어졌다.

이듬해 병진년五월에는 호서지방에 대한발이 있어 연산(燕山)은 공을 호서지방에 보내어 수차(水車)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해 九월에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공은 十一월에 상례(相禮)에서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정사년(丁巳年;1497)二월에 부태묘(부太廟;임금의 三년상을 마치고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신다는 말인데 이때는 시호 성종때의 일)한후에 공은 연산의 실정(失政)을 극간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고 또한 공경대신들에게도 호된 비평을 가하였다. 이달에 상례(相禮)로 강등되고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돌아와 예빈사정(禮賓寺正)이 되었는데 이처럼 강등된 이유는 권귀층(權貴層)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병오년 七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나 공과 신종호등 八인은 일찍기 문과에 급제하여 출중한 인재들인바 연산은 점필제(점畢齊;김종학)에 이어서 그들의 집을 수색케 하였는데 유독 공의 집에서만 점필제집(점畢齊集)이 발견되어 공은 고문을 당하고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남도 단천으로 유배당하였다.

공은 단천 적소(謫所)안에 갖힌 몸이었지만 담담한 자세로 지냈으며 갑자년(1504)十월에 이르러 연산의 명으로 투옥되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바로 그 전날밤 김전(金銓)공과 홍광필(洪光弼)공등도 경죄(輕罪)로써 같은 옥내에 갖혀있었는데 그들이 전별주(餞別酒)를 주니 선생은 일일이 잔을 받아 마시고 결별하면서도 끝까지 정중하였고 조금도 신색(神色)이 흐트러지지 아니하여 이해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다.

공은 갑술년(1454)에 출생하여 이해 51세였고 병인년에 중종 정국(靖國)후에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로 추증되었다.

선생은 모든 견문이나 학문에 있어 그 해박함이 과인 하였고 특히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후생들을 교도(敎導)함에 있어서도 진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해남현(現해남군)은 해남벽지에 위치하여 있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 예의 또한 밝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선생의 처가댁이 이곳이라  다년간 머물면서 정론으로써 누속(陋俗)을 개선하였으며 또한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와 같은 두 수재와 내 선인(先人;柳眉岩의 부친)을 자산을 기울여서까지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교도를 받으려는 학생이 향내에서 모여들어 마침내 이곳을

문필향(文筆鄕)으로 만들었다. 한양에 있을때에도 권우란(權遇鸞)등은 자주와서 질의하는 등 더욱 많은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은 엄격하며 근면하고 염결(廉潔)하였으며 절제가 있어 거가(居家)할 때에는 사리(私利)를 탐하지 않았고 대간(台諫),시종(侍從)등 권세있는 벼슬에 재임시에도 보국(報國)만을 우선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분발할 뿐아니라 누차 정론(正論)을 간(諫)하여 대의의 부식에 진력하였다. 소시부터 품은 포부와 경세제민(經世齊民)의 백분의 일도 펴보지 못하고 비운을 만나 끝내는 무고하게 세상을 떠났기로 사림(士林)들은 통석을 금치 못하였다.

처형당한 후 선생이 소유한 것은 몰수당하였고 후사도 없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저술한 것이 거의 산재영락(散在零落)되고 十에二,三밖에 남아 있을 뿐으로 희춘(希春ㅡ柳尾岩)공이 公이 별세한지 60년후에야 수습하니 겨우 소기(疏記)와 비명칠수(碑銘七首)와 아울러 동국통감 120수를 얻었으며 二권을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기로 했다. 그의 기개(氣慨)와절개(節介)의 곧음과 특히 경륜의 규모와 논리의 정심(精深)함이 이 문집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일단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참고사항

저자 유희춘(柳希春);字는 인중(仁中)호는 미암(眉岩)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隣) 부인은 여류시인 송덕봉(宋德奉) 금남 최부(錦南 崔簿)외손주 처음엔 최산두(崔山斗)에게 배우고 뒤에 김안국(金安國)에게師事했다.

1538년별시문과급제,1546년 을사사화때 파직귀향 1547년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사건 연루 제주도유배,함경북도 종성으로 이배(異配 )19년유배생활 퇴계 이황과 주자학 서신교환 토론하고 1567년 선조 즉위후 석방 지제교(知製敎),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전라도 관찰사(觀察使),대사헌(大司諫),예조참판,이조참판,贈좌찬성

광주광산 무양서원,담양 의암서원,종성 종산서원,무장 충현사 배향 시호 문절공(文節公)


                                                        미암일기

참고※사항

금남선생 가계(家系)무계(誣系거짓 가계)에 대하여

금남선생은 이조시대에 있어 우리 탐진 최씨 거성이며 비록 품은 큰 포부와 경세(經世)의 펴보지 못하고 비운으로 종세(終世)하시었지만 선조 장경공의 기개와 절개를 승습(承習)한 분이므로 숭앙과 아울러 사표(師表)로 하고자 그 행록을 해역하는 바이다.

여기에 처기할 것은 금남선생이 무오사화로 비명에 가시고 후사가 없었고, 또 선생의 조부 이상의 세계(世系) 내력이 무징(無徵)하고 선생과 부조 양위가 형제가 없는 까닭에 그 외손인 나금호(羅錦湖,士침),유미암(柳眉岩.希春),김침랑(金寢郞.道齊)제공(諸公)이 공력으로 문집의 편수와 분묘의 수호를 해왔음이 명백한 사실인데도 강진문중에서 소위 경신보(庚申譜1800)를 편제할때 선생의 진의부위(進義副尉) 휘 정원(井元)공을 강진문중의   중조(中祖)준량후(浚良后)운룡(雲龍)의 제二자 자호(自湖)라 무계(誣系.거짓으로) 하여 三형제가 된다하였고, 아버님 휘 택(澤)공을 자호(自湖)의 제三자라하여 四형제가 되는것 같이 허위조작한 환란처사(幻亂處事)에 대해 분개해 마지 않는 진사공파 최유해(崔維海)공 외 16인은 신유년(1801)에 예조(禮曺)에,임술년(1802)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이와같은 난륜사실(亂倫事實)을 의법시정(依法是正)하도록 신판장(伸辦狀;진정서)을 제출하였든바 화기서인기인(火其書人其人;위계,僞系 거짓족보를 수집하여 소화무효화하고 계보대로 환원) 하라는 제사(提辭;판결문)가 내려졌었다. 그후 의벌처결을 확인하러 강진에 갔었는데 강진 대표들이 파보(破譜)하겠다고 누누히 간청하므로 돌아 왔었지만 현제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다 현제 강진최씨 나주최씨로 변형시켜 조상을욕먹이고있다,









참고사항

최정원(崔井元)진의부위 묘 나주시 南榮山鹽倉洞 配 永川崔氏

최택(崔澤)진사 配麗陽陳氏 묘 무안군 몽탄면소재

최부(崔簿)묘 上同  配 해남정씨 묘 해남

壻(사위)유계린(柳桂隣)나질(羅질)金雰

외손주;유성춘.유희춘(柳希春무양서원 유림향사)나사원 나사돈 나사침 나사척 金道濟 金德濟

증손;柳公漑(진사)柳景염(찰방)羅經 羅德純 羅德연 나덕명(都事)나덕준(현감)나덕윤(감찰)

     나덕헌(충렬공 무양서원 유림향사)

나주(羅州)라는 지명은 전라남도 나주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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