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드 프랑스 왕세자 (16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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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는 프랑스의 왕태자(도팽)로,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장남이다. 아들 부르고뉴 공작 도팽 루이가 태어난 후로는 두 사람의 도팽을 구별하기 위해서 대(大) 도팽(le Grand Dauphin)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의 70년이 넘는 치세 속에서 국왕이 되지 못한 채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 Louis de Fran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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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프랑스 왕세자 | |
재위 |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1일 |
전임자 | 루이 14세(1643년부터 1661년까지 공석) |
후임자 | 부르고뉴 공작 루이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61년 11월 1일 |
사망일 | 1711년 4월 14일 | (49세)
왕조 | 카페 왕조 |
가문 | 부르봉가 |
부친 | 루이 14세 |
모친 |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
배우자 | 마리아 안나 폰 바이에른 |
종교 | 천주교 |
생애편집
1661년 퐁텐블로 궁전에서 태어난 루이는 곧바로 왕태자로 책봉되었고,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의 가정교사는 당대 최고의 설교사이자 연설가인 모의 대주교 자크 베니뉴 보쉬에였다. 루이는 아주 총명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루이 14세는 아들의 신붓감으로 유럽 왕실의 여러 공주들을 물망에 올렸고, 그중에는 메디치 가문의 안나 마리아 루이자,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딸 마리 루이즈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도팽 루이의 아내로 선택된 것은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장녀 마리아 안나였다. 두 사람은 1680년 3월 7일 결혼했고 마리아 안나는 10년 뒤인 1690년 죽었다. 루이는 비밀리에 애인 마리 에밀리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왕태자비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자녀편집
도팽 루이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고, 그 중 장남 루이의 아들이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루이 15세이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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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 1682년 8월 16일 | 1712년 2월 18일(29세) | 부르고뉴 공작, 슬하 3남 | |
필리프 | 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62세) |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 8남 3녀 | |
샤를 | 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27세) | 베리 공작, 미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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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루이 14세 |
도팽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
후임 부르고뉴 공작 도팽 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