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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만치(木滿致, 403년~475년?)는 백제(百濟)의 귀족이자 관인, 무장으로,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목(木)씨 출신 귀족이다.

“목만치”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측 자료인 《일본서기》에 등장하고 한국의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이 설을 긍정할 경우 목만치는 475년까지 살아있었던 셈이 된다)

개요편집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는 《백제기》를 인용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목라근자는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만 이름이 보이는 백제의 장수로서, 근초고왕 24년에 해당하는 369년 당시 백제-의 연합군이 침미다례를 공격할 때 백제군을 지휘하였다.

이후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보며 백제 양국을 오고갔으며, 오진 천황 25년(294년, 보정연대 414년)에 직지왕(直支王)이 죽고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1] 국정을 장악하였다.[2] 왜의 오진 천황은 목만치를 왜로 불러들였다고 한다.[3]

「목만치」와 「목협만치」그리고 「소가노마치」편집

「목만치」와 「목협만치」편집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百濟本紀)3의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조에는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백제의 수도 위례성(尉禮城)으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의 공격 앞에서 개로왕이 죽음 직전에 피신시킨 왕자 문주(文周)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갔던 인물이다.[4]

1971년 일본의 사학자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에 의해 처음으로 소가 씨(蘇我氏)의 시조인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는 주장이 등장하고, 나아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는데[5]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제기된다. 「목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 25년은 서기로는 414년에 해당하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으로 서기로는 475년에 해당하여, 양자간에 시대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369년,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는 기록을 싣고 있는데 목만치가 태어났다는 「討新羅時」라는 사건의 시점은 바로 여기이며, 369년에 태어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간에 백여 년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6] 때문에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일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으로 파악되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일본서기》의 목만치의 활동 시기가 서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목만치의 탄생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되는데,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討新羅時」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목라근자가 활약할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1년전, 3년전에 해당하는 366년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 더욱이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新羅本紀)3의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이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서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는 백제와 신라 양국간 화친은 373년까지 깨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무턱대고 어느 한쪽의 기록만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8]

한문 기록의 특성상 「討新羅時 聚其國婦 而所生也」라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뭉뚱그려서 적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선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기록된 369년이 한창 임나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9]

「목만치」와 「소가노마치」편집

그러나 여전히 목만치가 과연 소가노 마치와 동일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1. . 백제의 명문 씨족인 목만치가 굳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소가 씨를 자칭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점.
  2. . 일본에서도 도래계 호족이 자신의 출자를 일부러 위조하는 것은 8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점.
  3. . 목협만치가 「남쪽으로 떠났다」고 해서 그 「남쪽」을 굳이 왜국으로 지목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실제로 목협만치가 호종했던 문주왕은 왜가 아닌 신라에서 원병을 얻어 돌아왔다)
  4. . 소가노 마치의 손자는 소가노 고마(蘇我高麗)로서 고려(고구려)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는데, 백제의 명문 씨족이 굳이 「고려」라는 단어를 손자의 이름으로 지을 이유가 없다는 점.[10]

가계편집

  • 아버지 : 목라근자(木羅斤資,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미상
    • 문신 : 목만치(木滿致, 403~475)

참고 문헌편집

  • 이희진 『가야정치사연구』, 1998년, 학연문화사
  • 홍윤기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2000년, 효형출판
  • KBS 역사스페셜팀 『역사스페셜』3권, 2001년, 효형출판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2004년, 웅진닷컴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년, (주)창비
  • 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2010년, 지식산업사
  • 정윤미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2011년, 시루

각주편집

  1. 실제로 전지왕이 사망한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술에 따르면, 재위 16년 만인 420년의 일이다. 구이신왕427년까지 재위하였다.
  2. 《일본서기》는 목만치의 국정 장악을 기술하면서 “대왜(大倭)의 목만치”라고 하여 그가 왜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본서기》의 다른 사본인 다나카본(田中本)에는 “대왜”라는 글자가 없을 뿐 아니라 《백제기》를 인용한 세주에서 목만치의 아버지를 목라근자로 기술한 점을 볼 때 목만치를 백제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2010년, 지식산업사, p.166).
  3. 《일본서기》, 오진키 25년조 「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大倭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專於任那, 來入我國往還貴國. 承制天朝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召之.』】」
  4.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5. 門脇禎二「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12号、1971年), 『「大化改新」史論』(思文閣出版、1991年), 鈴木靖民「木満致と蘇我氏」(『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51号, 1981年), 山尾幸久 『日本国家の形成』(岩波新書, 1977年).
  6. 목라근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기사를 120년이 아닌 180년을 인하하여 목라근자가 비유왕 때에 활약한 장군으로 보았던 야마오 유키히사의 지적도 있지만(山尾幸久『古代の日韓關係』1989, p.123~127) 목만치 한 사람의 나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목라근자의 활동 기사만 180년을 끌어내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된다(노중국, 위의 책, p.172).
  7. 《일본서기》는 기록의 특성상 해외, 특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대부분 「신라를 정벌하였다(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곤 하다.
  8. 이희진은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신라본기」, 와 《일본서기》「신공기」의 관련 기록을 비교해보면 가야 지역 평정과 관련해 364년을 전후해 신라와 왜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점이 일치하는 반면에 《삼국사기》는 「364년 왜의 침공(신라측의 승리)→366년 백제와의 화친→368년 백제와의 화친」의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 점, 《일본서기》는 「369년 신라 침공(왜의 승리)+가야 지역 평정」으로 신라와의 전쟁과 가야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점이 다르며,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제와 신라 양국의 화친과 《일본서기》의 신라 격파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이런 경우 《일본서기》보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이 더 정확하다는 전제하에, 「신라와 왜의 전쟁」과 「가야 지역 평정」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왜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물리치고 겸해서 가야를 평정했다」는 《일본서기》「신공기」의 기록과는 달리 「신라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다가 백제의 협조를 받아서 가야 지역을 평정했다」는 것이 되어 대단한 원정의 기록으로 어필되기 어렵게 되므로,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일본서기》 편찬방침상 대신라 전쟁(364년)과 가야 지역 평정(369년)이라는 두 가지 별개의 사실을 369년이라는 하나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몰아 기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희진, 『가야정치사연구』1998년, 학연문화사, p.60~62).
  9. 목라근자가 가야 지역을 평정하는 과정은 369년의 한 시점에서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들 목만치에게 세습될 정도로 꽤 장기간 유지되었던 굳건한 것이었다(이희진, 앞의 책, p.49). 한편 목라근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369년부터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475년까지의 시간 동안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 아신왕 12년(403년) 가을 7월조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쳤다고 한 것이 유일하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2010년, 창작과비평사, p.119).
  10. 또한 소가노 마치의 아들 이름인 가라코(韓子)나 손자 고마(즉 소가노 이나메稻目의 아버지) 등의 이름이 단순히 「이국풍」이라는 점에서 소가노 마치가 도래인이라는 설의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소가 씨가 실은 도래인이었다, 고 말하는 설이 오히려 소가 씨를 「역적」으로 보았던 사관과도 맞아 떨어졌기에 넓게 퍼질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미즈타니 치아키(水谷千秋)의 지적도 있다. 또한 「가라코(韓子)」라는 이름은 《일본서기》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24년 가을 9월조의 주에「대일본인이 도나리(蕃)의 여자를 얻어서 낳은 것을 가라코라고 한다(大日本人娶蕃女所生為韓子也)」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한반도인과 왜인 사이의 혼혈아를 통칭하는 용어였다는 점에서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함께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