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의 화

전한 무제 때 일어난 여태자의 반란
(무고의 난에서 넘어옴)

무고의 화(巫蠱-禍)는 전한 무제의 치세인 기원전 91년(정화 2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여태자 유거무고라는 주술을 통해 황제를 죽이고자 했다가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켜 전한의 수도 장안을 일대 혼란에 빠뜨렸다. 무고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전개 과정편집

기원전 92년(정화 원년) 여름 무제가 건장궁에 있을 당시 한 남자가 대검을 차고 중룡화문으로 들어갔다. 보고를 받은 무제는 수상하다면서 그 남자를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검을 버린 채 남자가 도주하여 체포에 실패했다. 화가 난 무제는 성문을 지키는 문후(門候)를 처형했다.[1] 그해 11월 삼보 기사를 동원해 상림원을 수색했는데 이를 위해 장안의 성문도 닫았다. 11일에 걸친 수색이 끝난 뒤에서야 성문도 개방됐는데 이 무렵 무고의 화가 시작되었다.[2][3]

공손하의 부인이 무사황후의 언니였기 때문에 공손하는 무제의 중용을 받았고 태복을 거쳐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4][5] 공손하가 승상이 되었을 때 그의 아들 공손경성이 태복에 임명됐는데 황후의 조카라는 권세를 바탕으로 사치가 부렸다. 그러다 공손경성이 북군의 군비를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는 일이 일어났다.[6][7] 공손하는 양릉(陽陵)의 협객이던 주안세를 체포하는 것으로 황제가 아들의 죄를 사면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체포된 주안세가 "승상의 재앙이 황족에까지 미쳤다. 남산의 대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내 자백을 쓰기에 부족하고 야곡의 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나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우지 못한다"라며 비웃었다. 또한 투옥된 뒤에는 공손경성이 무제의 딸인 양석공주와 사통하고 있으며 감천궁으로 가는 길에 인형을 묻어 황제를 저주하고 있다는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다.[8][9]

해가 바뀐 뒤 봄 정월에 공손하도 투옥되었고 아들과 함께 옥살하고 말았다. 공손하의 일족도 모두 주살되었다.[10][11][12] 후임 승상에는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인 요군태수 유굴리가 임명되었다.[13][14] 여름 윤4월에는 무제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 무사황후의 조카이자 위청의 아들인 장평후 위항도 주살되었다.[15][16][17] 이 무렵 황제는 병이 들어 감천궁에 거처하고 있었다.[18][19] 태자의 미움을 받던 강충은 노령의 황제가 죽으면 태자가 보위를 이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병석에 눕자 황제의 병은 무고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분노한 황제는 곧장 무고 사건을 수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0][21][22] 강충은 호무(胡巫)를 통솔해 땅을 파서 인형을 찾아내고 술사를 체포해 증거를 조작하고 고문을 하여 자백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23][24]

늙은 황제는 좌우의 신하 모두가 자신을 무고로 저주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강충은 호무의 일원인 단하(檀何)로 하여금 궁중의 고기(蠱気)를 없애지 않으면 황제의 쾌유는 바랄 수 없다고 보고하게 했고 안도후 한열, 어사 장공, 황문시랑 소문 등에게 궁중의 수색을 명했다. 수색의 범위는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 후궁부터 시작하여 황후궁과 태자궁에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문제의 인형이 발견되었다.[25][26][27][28] 태자는 깜짝 놀라 태자소부 석덕에게 이를 물었으나 석덕은 연좌당할 것을 우려하여 진나라 부소의 예를 인용해 황제의 사자라고 속여서라도 강충을 붙잡아 음모를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태자를 몰아넣으려는 강충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기에 결국 태자는 석덕의 말을 받아들였다.[29][30]

가을 7월, 태자의 식객이 황제의 사자를 속여 강충을 붙잡았다. 한열은 진짜 황제의 사자가 맞는지 의심하여 말을 따르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장공도 상처를 입었고 곧 죽었다. 태자는 강충에게 "천한 조나라 놈이 과거 조왕 부자를 이간질한 것도 모자라 이젠 우리 부자까지 이간질하려 드는가!"라며 모욕한 뒤 역시 죽였다. 조나라 출신 강충이 조나라 세자의 죄를 파헤친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이후 호무도 상림원에서 불태워 죽였다. 그날 밤 태자는 황제의 기를 들고 미앙궁에 들어가 장어(長御) 의화를 통해 황후에게 일어나는 일의 전말을 전하고 장락궁의 위병을 동원해 무기고에서 무기를 반출했다.[31][32][33]

소문은 무사히 감천궁으로 도망가는 데 성공했고 황제에게 태자가 모반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황제는 모반을 인정하지 않고 태자를 소환해서 물어보고자 했다. 그런데 황제가 태자에게 보낸 사자가 태자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태자를 만나보지도 않은 채 감천궁으로 돌아가서는 태자가 모반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고 결국 황제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34] 유굴리는 인수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승상부에서 도망치면서 황제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를 통해 아직 유굴리가 사건을 공개하지 않고 군사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 황제는 "사태가 급박하기 우선 공개해야 한다. 승상은 주공 단의 풍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주공은 관숙 선채숙 도를 토벌하지 않았던가!"라며 유굴리를 질책했다. 황제는 유굴리에게 새서(璽書)를 주면서 사상자를 최대한 적게 내면서 성문을 막아 모반한 자들을 놓치지 말 것을 지시했다.[35][36]

태자는 백관을 불러모아 "폐하께서 감천궁에서 병석에 누워 계시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하다. 간신이 이를 틈타 난을 일으키려 한 것 같다"라고 말했으나 이 무렵 황제는 감천궁에서 건장궁으로 이어했고 삼보 근현의 병사를 동원해 유굴리에게 이를 지휘하도록 했다.[37][38] 태자는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죄인을 석방하고 석덕장광에게 병사를 이끌게 했으며 여후(如侯)를 보내 이민족 기병을 장안에 부르고자 했다. 그런데 여후가 시랑 마통에게 체포되면서 일을 그르쳤고 마통이 오히려 이민족 기병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또한 집(楫)과 노(棹)의 수부(水夫)를 동원해 대홍려 상구성에게 이를 맡겼다.[39][40] 한편, 당시 한나라가 쓰던 기는 붉은색이었는데 태자가 이를 임의로 사용하자 구분하기 위해 황금색 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1][42][43]

태자는 북군의 병사를 동원하기 위해 호북군사자 임안을 불렀으나 임안은 부름에 응하면서도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태자는 북군을 동원하는 계획을 포기했고 장안의 9시 중 4시에서 병사를 긁어모아 수만의 군세를 만들었다. 장락궁 서쪽 궐하에서 유굴리의 군대와 맞닥뜨리면서 처음 전투가 발생했고 이는 5일에 걸쳤다. 하지만 장안에 이미 태자가 모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태자에게 가담하려는 사람은 갈수록 줄었고 결국 태자는 패배하여 남쪽의 복앙성문을 통해 도주했다.[44][45] 복앙성문을 지키던 사직 전인은 태자를 동정하여 이를 막지 않았고 태자는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46][47]

황제는 태자를 수색하라고 지시했는데 호관현의 삼로(三老) 무(茂)가 상서하여 태자를 용서해줄 것을 청했다. 황제는 내심 동조했으나 사면할 수는 없다고 여겨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8][49] 태자는 호현 천구리로 달아났지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가 잡히는 바람에 위치가 들통나고 말았다. 8월 추격자가 태자가 숨어있던 집을 포위하자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여긴 태자는 목을 메달아 자결했다. 산양현 출신의 장부창이라는 병사가 문을 부쉈고 신안현 영사 이수가 뛰어들어 태자를 끌어내렸지만 이미 숨진 뒤였다. 태자를 숨겨줬던 집주인은 맞서 싸우다가 죽었고 황손 두 명도 피살되었다.[50][51][52]

결과편집

태자가 패퇴한 후에 종정 유장락집금오 유감이 황후에게 파견되었고 곧 황후는 자결했다. 시신은 작은 관에 넣어져 장안의 남쪽 동백에 안장됐다. 이후 황후의 일족 또한 모두 주살되었다.[53][54][55] 태자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역시 모두 죽었다. 양제 사씨는 황후와 함께 동백에 묻혔고 양제의 아들 황사손 유진은 부인 왕씨와 딸과 함께 광명에 묻혔고 두 남동생은 태자와 함께 호현에 묻혔다.[56][57] 황사손의 아들 유병이만이 갓난아이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58][59]

태자궁에 빈객으로 출입하던 자들도 주살되었고 태자와 함께 싸운 자들은 구족이 멸망당했다. 어쩔 수 없이 태자의 편에 섰던 자들은 돈황군으로 강제이전되었다.[60][61] 유굴리는 태자를 놓아준 죄로 전인을 처형코자 했으나 어사대부 포승지가 황제의 재가 없이 처형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전인은 사직이면서 모반인을 놓아주었으니 승상이 이를 참하려는 것은 법을 따른 것이다. 어사대부는 어찌하여 멋대로 이를 말리는가"라며 격노했고 이를 들은 포승지는 두려워하여 자살하고 말았다.[62][63] 결국 전인은 태자의 부름에 응했음에도 군을 움직이지 않아 두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임안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졌다.[64][65] 마통·경건·상구성은 각각 여후·석덕·장광을 체포한 공을 인정받아 중합후·덕후·예후의 작위를 받았다.[66][67] 태자를 체포한 공에 대해서도 이수는 촉후가, 장부창은 제후(題侯)가 되었다.[68][69]

후일담편집

무고(巫蠱)의 화는 모두 무고(誣告)였다. 기원전 90년(정화 3년) 가을 무렵에 고침랑 전천추가 상서하여 태자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에 황제는 전천추를 즉시 대홍려에 임명하고 몇 개월이 지나서는 승상으로 삼았다. 이후 강충의 일족이 모두 주살되었고 소문은 횡문의 다리 위에서 불타 죽었다. 천구리에서 태자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는 북지군의 태수로 임명받았는데 본인을 포함한 일족이 모두 주살되었다. 황제는 죽은 태자를 위해 호현에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70][71]

같은 해에 부인이 무고를 행했다는 이유로 승상 유굴리가 요참형을 당했으며[72][73][74] 이광리도 여기에 얽혀 결국 흉노에 항복하는 일이 일어났고[75][76] 이광리와 관계가 깊던 이수도 주살당했다.[77][78] 기원전 88년(후원 원년) 마통이 형 마하라와 함께 모반했다가 요참형에 처해졌고[79][80] 경건도 마통에게 연좌되어 같이 요참형에 처해졌다.[81] 상구성은 자살했고[82][83][84] 장부창은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85]

기원전 87년(후원 2년) 봄 2월 황제는 병에 걸려 몸져누웠고 유불릉을 태자로 세웠다.[86][87] 황제는 곧 병사했고 태자가 소제로 즉위했다.[88][89] 기원전 82년(시원 5년) 장안에 자신이 폐태자 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남자가 정말로 폐태자와 닮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경조윤 준불의는 그 남자를 체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하양현에서 태어나 호현에서 점쟁이를 하고 있던 남자로 이름은 장방년 혹은 성방수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남자는 곧 요참당했다.[90][91][92]

소제가 죽고 창읍왕 유박이 황제가 되었으나 선제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상중에 고기를 먹은 죄로 곽광에 의해 폐위되고 그 후임으로 폐태자 유거의 손자 유병이가 황제가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74년(원평 원년)으로 무고의 화가 일어난 지 17년이 지난 때였다.[93] 이가 곧 선제로 즉위 후에 자신의 조부모와 부모의 오명을 벗기고 폐태자와 황사손에게 각각 여(戾)와 도(悼)의 시호를 올린 뒤 이장했다.[94][95]

각주편집

  1.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居建章宮,見一男子帶劍入中龍華門,疑其異人,命收之。男子捐劍走,逐之弗獲。上怒,斬門候。”
  2. 한서》 권6 본기6:“冬十一月,發三輔騎士大搜上林,閉長安城門索,十一日乃解。巫蠱起。”
  3. 《자치통감》 권22 한기14:“冬,十一月,發三輔騎士大搜上林,閉長安城門索;十一日乃解。巫蠱始起。”
  4. 《한서》 권66 열전36:“賀夫人君孺,衛皇后姊也,賀由是有寵。”
  5.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丞相公孫賀夫人君孺,衞皇后姊也,賀由是有寵。”
  6. 《한서》 권66 열전36:“賀子敬聲,代賀為太僕,父子並居公卿位。敬聲以皇后姊子,驕奢不奉法,征和中擅用北軍錢千九百萬,發覺,下獄。”
  7. 《자치통감》 권22 한기14:“賀子敬聲代父為太僕,驕奢不奉法,擅用北軍錢千九百萬;發覺,下獄。”
  8. 《한서》 권66 열전36:“是時詔捕陽陵朱安世不能得,上求之急,賀自請逐捕安世以贖敬聲罪。上許之。後果得安世。安世者,京師大俠也,聞賀欲以贖子,笑曰:「丞相禍及宗矣。南山之竹不足受我辭,斜谷之木不足為我械。」安世遂從獄中上書,告敬聲與陽石公主私通,及使人巫祭祠詛上,且上甘泉當馳道埋偶人,祝詛有惡言。”
  9. 《자치통감》 권22 한기14:“是時詔捕陽陵大俠朱安世甚急,賀自請逐捕安世以贖敬聲罪,上許之。後果得安世。安世笑曰:「丞相禍及宗矣!」遂從獄中上書,告「敬聲與陽石公主私通;上且上甘泉,使巫當馳道埋偶人,祝詛上,有惡言。」”
  10. 《한서》 권6 본기6:“二年春正月,丞相賀下獄死。”
  11. 《한서》 권66 열전36:“下有司案驗賀,窮治所犯,遂父子死獄中,家族。”
  12. 《자치통감》 권22 한기14:“春,正月,下賀獄,案驗
  13. 《한서》 권66 열전36:“劉屈氂,武帝庶兄中山靖王子也,不知其始所以進。征和二年春,制詔御史:「故丞相賀倚舊故乘高勢而為邪,興美田以利子弟賓客,不顧元元,無益邊穀,貨賂上流,朕忍之久矣。終不自革,乃以邊為援,使內郡自省作車,又令耕者自轉,以困農煩擾畜者,重馬傷秏,武備衰減;下吏妄賦,百姓流亡;又詐為詔書,以姦傳朱安世。獄已正於理。其以涿郡太守屈氂為左丞相,分丞相長史為兩府,以待天下遠方之選。夫親親任賢,周唐之道也。以澎戶二千二百封左丞相為澎侯。」”
  14. 《자치통감》 권22 한기14:“以涿郡太守劉屈氂為丞相,封澎侯。屈氂,中山靖王子也。”
  15. 《한서》 권6 본기6:“閏月,諸邑公主、陽石公主皆坐巫蠱死。”
  16. 《한서》 권63 열전33:“丞相公孫賀父子,陽石、諸邑公主,及皇后弟子長平侯衛伉皆坐誅。”
  17. 《자치통감》 권22 한기14:“閏月,諸邑公主、陽石公主及皇后弟子長平侯伉皆坐巫蠱誅。”
  18. 《한서》 권6 본기6:“夏,行幸甘泉。”
  19.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行幸甘泉。”
  20. 《한서》 권45 열전15:“後上幸甘泉,疾病,充見上年老,恐晏駕後為太子所誅,因是為姦,奏言上疾祟在巫蠱。於是上以充為使者治巫蠱。”
  21. 《한서》 권63 열전33:“充與太子及衛氏有隙,恐上晏駕後為太子所誅,會巫蠱事起,充因此為姦。”
  22. 《자치통감》 권22 한기14:“江充自以與太子及衞氏有隙,見上年老,恐晏駕後為太子所誅,因是為姦,言上疾祟在巫蠱。於是上以充為使者,治巫蠱獄。”
  23. 《한서》 권45 열전15:“充將胡巫掘地求偶人,捕蠱及夜祠,視鬼,染汙令有處,輒收捕驗治,燒鐵鉗灼,強服之。民轉相誣以巫蠱,吏輒劾以大逆亡道,坐而死者前後數萬人。”
  24. 《자치통감》 권22 한기14:“充將胡巫掘地求偶人,捕蠱及夜祠、視鬼,染汙令有處,輒收捕驗治,燒鐵鉗灼,強服之。民轉相誣以巫蠱,吏輒劾以為大逆無道;自京師、三輔連及郡、國,坐而死者前後數萬人。”
  25. 《한서》 권6 본기6:“秋七月,按道侯韓說、使者江充等掘蠱太子宮。”
  26. 《한서》 권45 열전15:“是時,上春秋高,疑左右皆為蠱祝詛,有與亡,莫敢訟其冤者。充既知上意,因言宮中有蠱氣,先治後宮希幸夫人,以次及皇后,遂掘蠱於太子宮,得桐木人。”
  27. 《한서》 권63 열전33:“充典治巫蠱,既知上意,白言宮中有蠱氣,入宮至省中,壞御座掘地。上使按道侯韓說、御史章贛、黃門蘇文等助充。充遂至太子宮掘蠱,得桐木人。”
  28. 《자치통감》 권22 한기14:“是時,上春秋高,疑左右皆為蠱祝詛;有與無,莫敢訟其冤者。充旣知上意,因胡巫檀何言:「宮中有蠱氣;不除之,上終不差。」上乃使充入宮,至省中,壞御座,掘地求蠱;又使按道侯韓說、御史章贛、黃門蘇文等助充。充先治後宮希幸夫人,以次及皇后、太子宮,掘地縱橫,太子、皇后無復施牀處。充云:「於太子宮得木人尤多,又有帛書,所言不道;當奏聞。」”
  29. 《한서》 권63 열전33:“時上疾,辟暑甘泉宮,獨皇后、太子在。太子召問少傅石德,德懼為師傅并誅,因謂太子曰:「前丞相父子、兩公主及衛氏皆坐此,今巫與使者掘地得徵驗,不知巫置之邪,將實有也,無以自明,可矯以節收捕充等繫獄,窮治其姦詐。且上疾在甘泉,皇后及家吏請問皆不報,上存亡未可知,而姦臣如此,太子將不念秦扶蘇事耶?」太子急,然德言。”
  30. 《자치통감》 권22 한기14:“太子懼,問少傅石德。德懼為師傅幷誅,因謂太子曰:「前丞相父子、兩公主及衞氏皆坐此,今巫與使者掘地得徵驗,不知巫置之邪,將實有也,無以自明。可矯以節收捕充等繫獄,窮治其姦詐。且上疾在甘泉,皇后及家吏請問皆不報;上存亡未可知,而姦臣如此,太子將不念秦扶蘇事邪!」太子曰:「吾人子,安得擅誅!不如歸謝,幸得無罪。」太子將往之甘泉,而江充持太子甚急;太子計不知所出,遂從石德計。”
  31. 《한서》 권45 열전15:“江充字次倩,趙國邯鄲人也。充本名齊,有女弟善鼓琴歌舞,嫁之趙太子丹。齊得幸於敬肅王,為上客。久之,太子疑齊以己陰私告王,與齊忤,使吏逐捕齊,不得,收繫其父兄,按驗,皆棄市。齊遂絕跡亡,西入關,更名充。詣闕告太子丹與同產姊及王後宮姦亂,交通郡國豪猾,攻剽為姦,吏不能禁。書奏,天子怒,遣使者詔郡發吏卒圍趙王宮,收捕太子丹,移繫魏郡詔獄,與廷尉雜治,法至死。趙王彭祖,帝異母兄也,上書訟太子罪,言「充逋逃小臣,苟為姦訛,激怒聖朝,欲取必於萬乘以復私怨。後雖亨醢,計猶不悔。臣願選從趙國勇敢士,從軍擊匈奴,極盡死力,以贖丹罪。」上不許,竟敗趙太子。初,充召見犬臺宮,自請願以所常被服冠見上。上許之。充衣紗縠襌衣,曲裾後垂交輸,冠襌纚步搖冠,飛翮之纓。充為人魁岸,容貌甚壯。帝望見而異之,謂左右曰:「燕趙固多奇士。」既至前,問以當世政事,上說之。”
  32. 《한서》 권63 열전33:“征和二年七月壬午,乃使客為使者收捕充等。按道侯說疑使者有詐,不肯受詔,客格殺說。御史章贛被創突亡,自歸甘泉。太子使舍人無且持節夜入未央宮殿長秋門,因長御倚華具白皇后,發中廏車載射士,出武庫兵,發長樂宮衛,告令百官曰江充反。乃斬充以徇,炙胡巫上林中。”
  33. 《자치통감》 권22 한기14:“秋,七月,壬午,太子使客詐為使者,收捕充等;按道侯說疑使者有詐,不肯受詔,客格殺說。太子自臨斬充,罵曰:「趙虜!前亂乃國王父子不足邪!乃復亂吾父子也!」又炙胡巫上林中。太子使舍人無且持節夜入未央宮殿長秋門,因長御倚華具白皇后,發中廏車載射士,出武庫兵,發長樂宮衞卒。”
  34. 《자치통감》 권22 한기14:“蘇文迸走,得亡歸甘泉,說太子無狀。上曰:「太子必懼,又忿充等,故有此變。」乃使使召太子。使者不敢進,歸報云:「太子反已成,欲斬臣,臣逃歸。」上大怒。”
  35. 《한서》 권66 열전36:“其秋,戾太子為江充所譖,殺充,發兵入丞相府,屈氂挺身逃,亡其印綬。是時上避暑在甘泉宮,丞相長史乘疾置以聞。上問「丞相何為?」對曰:「丞相祕之,未敢發兵。」上怒曰:「事籍籍如此,何謂祕也?丞相無周公之風矣。周公不誅管蔡乎?」乃賜丞相璽書曰:「捕斬反省,自有賞罰。以牛車為櫓,毋接短兵,多殺傷士眾。堅閉城門,毋令反者得出。」”
  36.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丞相屈氂聞變,挺身逃,亡其印綬,使長史乘疾置以聞。上問:「丞相何為?」對曰:「丞相祕之,未敢發兵。」上怒曰:「事籍籍如此,何謂祕也!丞相無周公之風矣,周公不誅管、蔡乎!」乃賜丞相璽書曰:「捕斬反者,自有賞罰。以牛車為櫓,毋接短兵,多殺傷士衆!堅閉城門,毋令反者得出!」”
  37. 《한서》 권66 열전36:“太子既誅充發兵,宣言帝在甘泉病困,疑有變,姦臣欲作亂。上於是從甘泉來,幸城西建章宮,詔發三輔近縣兵,部中二千石以下,丞相兼將。”
  38. 《자치통감》 권22 한기14:“太子宣言告令百官云:「帝在甘泉病困,疑有變;姦臣欲作亂。」上於是從甘泉來,幸城西建章宮,詔發三輔近縣兵,部中二千石以下,丞相兼將之。”
  39. 《한서》 권66 열전36:“太子亦遣使者撟制赦長安中都官囚徒,發武庫兵,命少傅石德及賓客張光等分將,使長安囚如侯持節發長水及宣曲胡騎,皆以裝會。侍郎莽通使長安,因追捕如侯,告胡人曰:「節有詐,勿聽也。」遂斬如侯,引騎入長安,又發輯濯士,以予大鴻臚商丘成。”
  40. 《자치통감》 권22 한기14:“太子亦遣使者矯制赦長安中都官囚徒,命少傅石德及賓客張光等分將;使長安囚如侯持節發長水及宣曲胡騎,皆以裝會。侍郎馬通使長安,因追捕如侯,告胡人曰:「節有詐,勿聽也!」遂斬如侯,引騎入長安;又發楫棹士以予大鴻臚商丘成。”
  41. 《한서》 권6 본기6:“更節加黃旄。”
  42. 《한서》 권66 열전36:“初,漢節純赤,以太子持赤節,故更為黃旄加上以相別。”
  43. 《자치통감》 권22 한기14:“初,漢節純赤;以太子持赤節,故更為黃旄加上以相別。”
  44. 《한서》 권66 열전36:“太子召監北軍使者任安發北軍兵,安受節已閉軍門,不肯應太子。太子引兵去,敺四市人凡數萬眾,至長樂西闕下,逢丞相軍,合戰五日,死者數萬人,血流入溝中。丞相附兵浸多,太子軍敗,南奔覆盎城門,得出。”
  45. 《자치통감》 권22 한기14:“太子立車北軍南門外,召護北軍使者任安,與節,令發兵。安拜受節;入,閉門不出。太子引兵去,敺四市人凡數萬衆,至長樂西闕下,逢丞相軍,合戰五日,死者數萬人,血流入溝中。民間皆云「太子反」,以故衆不附太子,丞相附兵寖多。庚寅,太子兵敗,南奔覆盎城門。”
  46. 사기》 권104 열전44:“數歲,坐太子事。時左相自將兵,令司直田仁主閉守城門,坐縱太子,下吏誅死。”
  47. 《자치통감》 권22 한기14:“司直田仁部閉城門,以為太子父子之親,不欲急之,太子由是得出亡。”
  48. 《한서》 권63 열전33:“上怒甚,群下憂懼,不知所出。壺關三老茂上書曰:「臣聞父者猶天,母者猶地,子猶萬物也。故天平地安,陰陽和調,物乃茂成;父慈母愛室家之中,子乃孝順。陰陽不和則萬物夭傷,父子不和則室家喪亡。故父不父則子不子,君不君則臣不臣,雖有粟,吾豈得而食諸!昔者虞舜,孝之至也,而不中於瞽叟;孝己被謗,伯奇放流,骨肉至親,父子相疑。何者?積毀之所生也。由是觀之,子無不孝,而父有不察。今皇太子為漢適嗣,承萬世之業,體祖宗之重,親則皇帝之宗子也。江充,布衣之人,閭閻之隸臣耳,陛下顯而用之,銜至尊之命以迫蹴皇太子,造飾姦詐,群邪錯謬,是以親戚之路鬲塞而不通。太子進則不得上見,退則困於亂臣,獨冤結而亡告,不忍忿忿之心,起而殺充,恐懼逋逃,子盜父兵以救難自免耳,臣竊以為無邪心。詩云:『營營青蠅,止于藩;愷悌君子,無信讒言;讒言罔極,交亂四國。』往者江充讒殺趙太子,天下莫不聞,其罪固宜。陛下不省察,深過太子,發盛怒,舉大兵而求之,三公自將,智者不敢言,辯士不敢說,臣竊痛之。臣聞子胥盡忠而忘其號,比干盡仁而遺其身,忠臣竭誠不顧鈇鉞之誅以陳其愚,志在匡君安社稷也。詩云:『取彼譖人,投畀豺虎。』唯陛下寬心慰意,少察所親,毋患太子之非,亟罷甲兵,無令太子久亡。臣不勝惓惓,出一旦之命,待罪建章闕下。」書奏,天子感寤。”
  49.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怒甚,羣下憂懼,不知所出。壺關三老茂上書曰:「臣聞父者猶天,母者猶地,子猶萬物也,故天平,地安,物乃茂成;父慈,母愛,子乃孝順。今皇太子為漢適嗣,承萬世之業,體祖宗之重,親則皇帝之宗子也。江充,布衣之人,閭閻之隸臣耳;陛下顯而用之,銜至尊之命以迫蹴皇太子,造飾姦詐,羣邪錯繆,是以親戚之路鬲塞而不通。太子進則不得見上,退則困於亂臣,獨冤結而無告,不忍忿忿之心,起而殺充,恐懼逋逃,子盜父兵,以救難自免耳;臣竊以為無邪心。詩曰:『營營青蠅,止于藩。愷悌君子,無信讒言。讒言罔極,交亂四國。』往者江充讒殺趙太子,天下莫不聞。陛下不省察,深過太子,發盛怒,舉大兵而求之,三公自將;智者不敢言,辯士不敢說,臣竊痛之!唯陛下寬心慰意,少察所親,毋患太子之非,亟罷甲兵,無令太子久亡!臣不勝惓惓,出一旦之命,待罪建章宮下!」書奏,天子感寤,然尚未敢顯言赦之也。”
  50. 《한서》 권6 본기6:“八月辛亥,太子自殺于湖。”
  51. 《한서》 권63 열전33:“太子之亡也,東至湖,臧匿泉鳩里。主人家貧,常賣屨以給太子。太子有故人在湖,聞其富贍,使人呼之而發覺。吏圍捕太子,太子自度不得脫,即入室距戶自經。山陽男子張富昌為卒,足蹋開戶,新安令史李壽趨抱解太子,主人公遂格鬥死,皇孫二人皆并遇害。”
  52. 《자치통감》 권22 한기14:“太子亡,東至湖,藏匿泉鳩里;主人家貧,常賣屨以給太子。太子有故人在湖,聞其富贍,使人呼之而發覺。八月,辛亥。吏圍捕太子。太子自度不得脫,卽入室距戶自經。山陽男子張富昌為卒,足蹋開戶,新安令史李壽趨抱解太子,主人公遂格鬬死,皇孫二人幷皆遇害。”
  53. 《한서》 권6 본기6:“庚寅,太子亡,皇后自殺。”
  54. 《한서》 권97上 열전67上:“詔遣宗正劉長樂、執金吾劉敢奉策收皇后璽綬,自殺。黃門蘇文、姚定漢輿置公車令空舍,盛以小棺,瘞之城南桐柏。衛氏悉滅。”
  55. 《자치통감》 권22 한기14:“詔遣宗正劉長、執金吾劉敢奉策收皇后璽綬,后自殺。”
  56. 《한서》 권63 열전33:“初,太子有三男一女,女者平輿侯嗣子尚焉。及太子敗,皆同時遇害。衛后、史良娣葬長安城南。史皇孫、皇孫妃王夫人及皇女孫葬廣明。皇孫二人隨太子者,與太子并葬湖。”
  57. 《한서》 권97上 열전67上:“武帝末,巫蠱事起,衛太子及良娣、史皇孫皆遭害。”
  58. 《한서》 권63 열전33:“太子有遺孫一人,史皇孫子,王夫人男,年十八即尊位,是為孝宣帝。”
  59. 《한서》 권8 본기8:“孝宣皇帝,武帝曾孫,戾太子孫也。太子納史良娣,生史皇孫。皇孫納王夫人,生宣帝,號曰皇曾孫。生數月,遭巫蠱事,太子、良娣、皇孫、王夫人皆遇害。語在太子傳。曾孫雖在襁褓,猶坐收繫郡邸獄。而邴吉為廷尉監,治巫蠱於郡邸,憐曾孫之亡辜,使女徒復作淮陽趙徵卿、渭城胡組更乳養,私給衣食,視遇甚有恩。”
  60. 《한서》 권66 열전36:“諸太子賓客,嘗出入宮門,皆坐誅。其隨太子發兵,以反法族。吏士劫略者,皆徙敦煌郡。”
  61. 《자치통감》 권22 한기14:“諸太子賓客嘗出入宮門,皆坐誅;其隨太子發兵,以反法族;吏士劫略者皆徙敦煌郡。”
  62. 《한서》 권66 열전36:“會夜司直田仁部閉城門,坐令太子得出,丞相欲斬仁。御史大夫暴勝之謂丞相曰:「司直,吏二千石,當先請,柰何擅斬之。」丞相釋仁。上聞而大怒,下吏責問御史大夫曰:「司直縱反者,丞相斬之,法也,大夫何以擅止之?」勝之皇恐,自殺。”
  63.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丞相欲斬仁,御史大夫暴勝之謂丞相曰:「司直,吏二千石,當先請,柰何擅斬之!」丞相釋仁。上聞而大怒,下吏責問御史大夫曰:「司直縱反者,丞相斬之,法也;大夫何以擅止之?」勝之惶恐,自殺。”
  64. 《한서》 권66 열전36:“及北軍使者任安,坐受太子節,懷二心,司直田仁縱太子,皆要斬。”
  65.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以為任安老吏,見兵事起,欲坐觀成敗,見勝者合從之,有兩心,與田仁皆要斬。”
  66. 《한서》 권66 열전36:“上曰:「侍郎莽通獲反將如侯,長安男子景建從通獲少傅石德,可謂元功矣。大鴻臚商丘成力戰獲反將張光。其封通為重合侯,建為德侯,成為秺侯。」”
  67.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以馬通獲如侯,長安男子景建從通獲石德,商丘成力戰獲張光,封通為重合侯,建為德侯,成為秺侯。”
  68. 《한서》 권63 열전33:“上既傷太子,乃下詔曰:「蓋行疑賞,所以申信也。其封李壽為邘侯,張富昌為題侯。」”
  69. 《자치통감》 권22 한기14:“上旣傷太子,乃封李壽為邘侯,張富昌為題侯。”
  70. 《한서》 권66 열전36:“車千秋,本姓田氏,其先齊諸田徙長陵。千秋為高寑郎。會衛太子為江充所譖敗,久之,千秋上急變訟太子冤,曰:「子弄父兵,罪當笞;天子之子過誤殺人,當何罪哉!臣嘗夢見一白頭翁教臣言。」是時,上頗知太子惶恐無他意,乃大感寤,召見千秋。至前,千秋長八尺餘,體貌甚麗,武帝見而說之,謂曰:「父子之間,人所難言也,公獨明其不然。此高廟神靈使公教我,公當遂為吾輔佐。」立拜千秋為大鴻臚。數月,遂代劉屈氂為丞相,封富民侯。”
  71. 《자치통감》 권22 한기14:“吏民以巫蠱相告言者,案驗多不實。上頗知太子惶恐無他意,會高寢郎田千秋上急變,訟太子冤曰:「子弄父兵,罪當笞。天子之子過誤殺人,當何罪哉!臣嘗夢一白頭翁敎臣言。」上乃大感寤,召見千秋,謂曰:「父子之間,人所難言也,公獨明其不然。此高廟神靈使公敎我,公當遂為吾輔佐。」立拜千秋為大鴻臚,而族滅江充家,焚蘇文於橫橋上,及泉鳩里加兵刃於太子者,初為北地太守,後族。上憐太子無辜,乃作思子宮,為歸來望思之臺於湖,天下聞而悲之。”
  72. 《한서》 권6 본기6:“六月,丞相屈氂下獄要斬,妻梟首。”
  73. 《한서》 권66 열전36:“其明年,貳師將軍李廣利將兵出擊匈奴,丞相為祖道,送至渭橋,與廣利辭決。廣利曰:「願君侯早請昌邑王為太子。如立為帝,君侯長何憂乎?」屈氂許諾。昌邑王者,貳師將軍女弟李夫人子也。貳師女為屈氂子妻,故共欲立焉。是時治巫蠱獄急,內者令郭穰告丞相夫人以丞相數有譴,使巫祠社,祝詛主上,有惡言,及與貳師共禱祠,欲令昌邑王為帝。有司奏請案驗,罪至大逆不道。有詔載屈氂廚車以徇,要斬東市,妻子梟首華陽街。貳師將軍妻子亦收。”
  74. 《자치통감》 권22 한기14:“初,貳師之出也,丞相劉屈氂為祖道,送至渭橋。廣利曰:「願君侯早請昌邑王為太子;如立為帝,君侯長何憂乎!」屈氂許諾。昌邑王者,貳師將軍女弟李夫人子也;貳師女為屈氂子妻,故共欲立焉。會內者令郭穰告「丞相夫人祝詛上及與貳師共禱祠,欲令昌邑王為帝」,按驗,罪至大逆不道。六月,詔載屈氂廚車以徇,要斬東市,妻子梟首華陽街;貳師妻子亦收。”
  75. 《한서》 권66 열전36:“貳師聞之,降匈奴,宗族遂滅。”
  76. 《자치통감》 권22 한기14:“貳師聞之,憂懼,其掾胡亞夫亦避罪從軍,說貳師曰:「夫人、室家皆在吏,若還,不稱意適與獄會,郅居以北,可復得見乎!」貳師由是狐疑,深入要功,遂北至郅居水上。虜已去,貳師遣護軍將二萬騎度郅居之水,逢左賢王、左大將將二萬騎,與漢軍合戰一日,漢軍殺左大將,虜死傷甚衆。軍長史與決眭都尉煇渠侯謀曰:「將軍懷異心,欲危衆求功,恐必敗。」謀共執貳師。貳師聞之,斬長史,引兵還至燕然山。單于知漢軍勞倦,自將五萬騎遮擊貳師,相殺傷甚衆;夜,塹漢軍前,深數尺,從後急擊之,軍大亂;貳師遂降。單于素知其漢大將,以女妻之,尊寵在衞律上。宗族遂滅。”
  77. 《한서》 권17 표5:“九月封,三年,坐為衛尉居守,擅出長安界,送海西侯至高橋,又使吏謀殺方士,不道,誅。”
  78. 《한서》 권19下 표7下:“邗侯李壽為衛尉,坐居守擅出長安界使吏殺人下獄死。”
  79. 《한서》 권6 본기6:“侍中僕射莽何羅與弟重合侯通謀反,侍中駙馬都尉金日磾、奉車都尉霍光、騎都尉上官桀討之。”
  80. 《한서》 권17 표5:“七月癸巳封,四年,後二年,坐發兵與衛尉潰等謀反,要斬。”
  81. 《한서》 권17 표5:“七月癸巳封,四年,後二年,坐共莽通謀反,要斬。”
  82. 《한서》 권6 본기6:“夏六月,御史大夫商丘成有罪自殺。”
  83. 《한서》 권17 표5:“延和二年七月癸巳封,四年,後二年,坐為詹事侍祠孝文廟,醉歌堂下曰「出居,安能鬱鬱」,大不敬,自殺。”
  84. 《한서》 권19下 표7下:“九月大鴻臚商丘成為御史大夫,四年坐祝詛自殺。”
  85. 《한서》 권17표5:“九月封,四年,後二年四月甲戌,為人所賊殺。”
  86. 《한서》 권6 본기6:“乙丑,立皇子弗陵為皇太子。”
  87. 《한서》 권7 본기7:“孝昭皇帝,武帝少子也。母曰趙婕妤,本以有奇異得幸,及生帝,亦奇異。語在外戚傳。武帝末,戾太子敗,燕王旦、廣陵王胥行驕嫚,後元二年二月上疾病,遂立昭帝為太子,年八歲。”
  88. 《한서》 권6 본기6:“丁卯,帝崩于五柞宮,入殯于未央宮前殿。三月甲申,葬茂陵。”
  89. 《한서》 권7 본기7:“明日,武帝崩。戊辰,太子即皇帝位,謁高廟。”
  90. 《한서》 권7 본기7:“夏陽男子張延年詣北闕,自稱衛太子,誣罔,要斬。”
  91. 《한서》 권71 열전41:“始元五年,有一男子乘黃犢車,建黃旐,衣黃襜褕,著黃冒,詣北闕,自謂衛太子。公車以聞,詔使公卿將軍中二千石雜識視。長安中吏民聚觀者數萬人。右將軍勒兵闕下,以備非常。丞相御史中二千石至者並莫敢發言。京兆尹不疑後到,叱從吏收縛。或曰:「是非未可知,且安之。」不疑曰:「諸君何患於衛太子!昔蒯聵違命出奔,輒距而不納,春秋是之。衛太子得罪先帝,亡不即死,今來自詣,此罪人也。」遂送詔獄。天子與大將軍霍光聞而嘉之,曰:「公卿大臣當用經術明於大誼。」繇是名聲重於朝廷,在位者皆自以不及也。大將軍光欲以女妻之,不疑固辭,不肯當。久之,以病免,終於家。京師紀之。後趙廣漢為京兆尹,言「我禁姦止邪,行於吏民,至於朝廷事,不及不疑遠甚。」廷尉驗治何人,竟得姦詐。本夏陽人,姓成名方遂,居湖,以卜筮為事。有故太子舍人嘗從方遂卜,謂曰:「子狀貌甚似衛太子。」方遂心利其言,幾得以富貴,即詐自稱詣闕。廷尉逮召鄉里識知者張宗祿等,方遂坐誣罔不道,要斬東市。一云姓張名延年。”
  92. 《자치통감》 권23 한기15:“有男子乘黃犢車詣北闕,自謂衞太子;公車以聞。詔使公、卿、將軍、中二千石雜識視。長安中吏民聚觀者數萬人。右將軍勒兵闕下以備非常。丞相、御史、中二千石至者並莫敢發言。京兆尹不疑後到,叱從吏收縛。或曰:「是非未可知,且安之!」不疑曰:「諸君何患於衞太子!昔蒯聵違命出奔,輒距而不納,春秋是之。衞太子得罪先帝,亡不卽死,今來自詣,此罪人也!」遂送詔獄。天子與大將軍霍光聞而嘉之曰:「公卿大臣當用有經術、明於大誼者。」繇是不疑名聲重於朝廷,在位者皆自以不及也。廷尉驗治何人,竟得姦詐,本夏陽人,姓成,名方遂,居湖,以卜筮為事。有故太子舍人嘗從方遂卜,謂曰:「子狀貌甚似衞太子。」方遂心利其言,冀得以富貴。坐誣罔不道,要斬。”
  93. 《한서》 권8 본기8:“庚申,入未央宮,見皇太后,封為陽武侯。已而群臣奉上璽綬,即皇帝位,謁高廟。”
  94. 《한서》 권63 열전33:“帝初即位,下詔曰:「故皇太子在湖,未有號諡,歲時祠,其議諡,置園邑。」有司奏請:「禮『為人後者,為之子也』,故降其父母不得祭,尊祖之義也。陛下為孝昭帝後,承祖宗之祀,制禮不踰閑。謹行視孝昭帝所為故皇太子起位在湖,史良娣冢在博望苑北,親史皇孫位在廣明郭北。諡法曰『諡者,行之跡也』,愚以為親諡宜曰悼,母曰悼后,比諸侯王園,置奉邑三百家。故皇太子諡曰戾,置奉邑二百家。史良娣曰戾夫人,置守冢三十家。園置長丞,周衛奉守如法。」以湖閿鄉邪里聚為戾園,長安白亭東為戾后園,廣明成鄉為悼園。皆改葬焉。”
  95. 《자치통감》 권24 한기16:“六月,詔曰:「故皇太子在湖,未有號諡,歲時祠;其議諡,置園邑。」有司奏請:「禮,為人後者,為之子也;故降其父母,不得祭,尊祖之義也。陛下為孝昭帝後,承祖宗之祀,愚以為親諡宜曰悼,母曰悼后;故皇太子諡曰戾,史良娣曰戾夫人。」皆改葬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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