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스페인 전쟁

쿠바와 필리핀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벌어진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영어: Spanish-American War, 스페인어: Guerra hispano-americana, 필리핀어: Digmaang Espanyol-Amerikano) 또는 미서전쟁(美西戰爭)은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스페인 간에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미국-스페인 전쟁

산후안 고지에서의 전투
날짜1898년 4월 25일 ~ 8월 12일
장소
결과 미국의 대승리로 필리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등을 차지함
교전국

미국 미국
쿠바 쿠바 제1공화국
푸에르토리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필리핀 제1공화국

스페인 스페인

지휘관

미국 윌리엄 매킨리
미국 넬슨 A. 마일스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윌리엄 R. 셰프터
미국 조지 듀이
미국 윌리엄 T. 심슨
미국 웨슬리 메리트
미국 찰스 D. 직스비

미국 조셉 윌러

스페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스페인 프라세데스 자가스타
스페인 파트리시오 몬토요
스페인 아르세리노 폼보
스페인 마누엘 마시아스
스페인 라몬 블랑코
스페인 발레리아노 웨이러
스페인 페르민 하우데네스
스페인 호세 벨라즈퀘즈

스페인 파스쿠알 세르베라
병력
쿠바군 3만 명
미군 30만 명
27만 8447명 (쿠바)
1만 5명 (푸에르토리코)
5만 1331명 (필리핀)

이 전쟁은 쿠바의 독립 운동이 스페인에 의해서 거부되자 이를 해결할 것을 미국이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내의 강력한 확장주의적 정서가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을 포함한 스페인의 잔존 해외 영토를 병합하도록 부추겼다. 아바나에서 일어난 혁명은 미국이 전함 메인 호를 보내 그들의 높은 국가적 관심을 보이도록 자극하였다. 메인 호의 폭발로 미국인들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스페인이 자신의 식민지를 억압하고 있다는 황색 언론은 미국의 여론을 움직였다.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괌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노예 문제로 촉발된 내분으로 남북전쟁을 겪은 후 내부 정비와 북미 대륙 개척에 몰두하던 미국이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배경 편집

19세기에 제창된 먼로주의[1]는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정치적 기초로서 작용하였다. 쿠바는 십년 전쟁 이후로, 자치권을 얻기 위해 때때로 투쟁하여 왔었다. 이미 1853년에 미국은 마드리드 주재 미국 공사를 통해 1억 5,000만달러(2017.12.09 기준 38,035,920,000,000 38조3백5십9억2000만원)에 쿠바 매입 의사를 타진했으나 스페인의 강한 반발만 불러일으켰다. 루이지애나프랑스로부터 매입했듯이 쿠바도 그렇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래스카러시아로부터 사들이기도 했다).

1895년, 쿠바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스페인에 대항한 소규모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 쿠바 리브레(Cuba Libre) 반란군은 미국을 포함한 외부 단체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들였다.[2] 1896년 쿠바에 새로 부임한 발레리아노 웨일러 장군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일반 쿠바 민중들을 반란군과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반란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1897년 말, 30만명 이상의 쿠바인들이 스페인군이 지키는 집단수용소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 수용소는 배고픔과 질병의 소굴이 되었고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2] 쿠바 출신 국외이주자들에 의하여 미국 내에서 벌어진 전쟁 선동은 고국의 동포에 대한 웨일러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공격하였고, 미국인들로부터 폭넓은 동정심을 받았다.

미국의 일반 여론은 쿠바가 독립하기를 희망했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쿠바에 약 5,000만 달러에 달하는 투자와 연간 1억 달러를 넘는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또 쿠바는 남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 운하지역으로 가는 통로를 장악하는 카리브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반 여론과 달리 매킨리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정부에게 쿠바의 독립은 관심사 밖이었다.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 전쟁이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의 행정부 바깥에서도 전쟁을 압박한 이들이 있는데, 미국 역사상 큰 힘을 발휘한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조지프 퓰리처였다. 두 신문사 사주들은 남북전쟁을 통하여 전쟁기사로 판매부수를 경이적으로 늘일 수 있음을 터득하였다. 이들은 전쟁을 조장하기기 위하여 쿠바인들에 대한 스페인 식민지배자의 잔혹성을 자극적으로 다루었으며 경쟁적으로 전쟁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웨일러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같은 황색 언론인으로부터 "도살자"로 치부되었다.

경과 편집

1898년 1월 쿠바 아바나에서 친스페인파 애국자인 쿠바인들에 의한 소요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웨일러 장군에 비판적인 지역 신문사 세 곳의 윤전기를 파괴하였다. 이 소요 기간 동안, 미국인들이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바나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2] 미국 해군이 주둔하게 된다.[3] 쿠바의 독립에 대하여 미국의 지원이 증가하자 적개심을 가진 친스페인파 쿠바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미국 정부는 아바나 주재 총영사 피츠휴 리(로버트 리의 조카)에게 미국의 이익 보호를 위하여 메인 호를 파견할 것이라고 통지하였다.

1898년 1월 25일 메인 호가 아바나에 도착하였다. 그 배의 정박은 뜻하지 않게 다음달까지 이어졌다. 독립군과 스페인군 간에 전투가 계속되던 1898년 2월 15일 오후 9시 40분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메인 호가 원인 모를 폭발을 일으켜 침몰함으로써 미 해군 266명이 사망하였다. 스페인은 그 사건의 원인을 내부 폭발로 돌렸으나, 미국은 그것이 기뢰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총 네 번의 메인 호 조사위원회가 폭발의 원인을 조사하였고 조사위원들은 각기 다양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스페인과 미국의 조사 결과도 서로 달랐다.[4] 미국 정부는 이를 쿠바 주둔 스페인군이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문제 삼아 스페인에 결국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당시 미국 내 언론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스페인 비방기사를 보도하며 미국과 스페인 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하지만, 1971년 메인호 폭발사건은 보일러실에서 일어난 사고로 스페인 군의 소행이 아님이 밝혀졌다. 199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위탁에 의하여 어드밴스트 마린 엔터프라이즈(Advanced Marine Enterprises)에 의해 수행된 조사는 "기뢰가 배 바닥을 안쪽으로 굽은 구조로 만들었고 결국 배의 폭발에 이르게 되었다는 예전의 결론은 그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결론내렸다.

마닐라만 전투 편집

전쟁은 쿠바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지 듀이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양 함대가 필리핀을 공격하였다. 이때 아기날도 휘하의 필리핀 독립군이 스페인군 공격에 가담하였고, 쿠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스페인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하여, 전쟁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 조약 편집

결국 필리핀과 쿠바 두 섬에서 미군에 밀려 패퇴를 거듭한 에스파냐는 미국과 강화를 추진하였고,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서 맺어진 《파리 강화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고,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지불키로 하였다.

시간순서별 요약 편집

  • 1668년 - 스페인을 정복함.
  • 1853년 - 미국은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미국 공사를 통해 1억 5,000만달러에 쿠바 매입 의사를 타진했으나 스페인의 강한 반발만 불러 일으킴.
  • 1895년 - 쿠바인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스페인은 본국에서 진압군을 파견함.
  • 1898년 2월 5일 - 쿠바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원인 모를 폭발을 일으켜 침몰함으로써 266명의 미 해군이 사망함. 스페인측의 공격이라고 하여,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함.
  • 1898년 4월 14일 - 스페인 본국에서 괌으로 마지막 전통문이 옴. 미서전쟁 발발 1개월 전임.
  • 1898년 5월 - 미국 제4 포병의 Lt. 헨리 H. 휘트니가 푸에르토리코에 정찰임무로 파견됨. 군정보부 육군부서의 지원을 받음. 그는 미국이 침략하기 전에 스페인군에 대한 정보와 지도를 가지고 돌아옴.
  • 1898년 5월 1일 - 미국조지 듀이가 이끄는 함대가 필리핀 마닐라 만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처부숨. 이 전투에서 스페인은 381명, 미군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사상자를 냄.
  • 1898년 5월 10일 - 미국 해군의 전함들이 푸에르토리코의 해안을 정찰함.(sight off)
  • 1898년 5월 12일 - 해군 소장 윌리엄 T. 샘슨이 지휘하는 미국 해군의 12대로 된 1개 전대가 산후안을 포격함.
  • 1898년 6월 20일 - 미국 순양함 찰스턴호의 선장 헨리 글래스가 을 점령함. 스페인함의 선장은 미서전쟁이 발발했는지 모른 채 찰스턴호에 승선하여 물품 지원을 요청했다가 모두 포로가 됨. 무혈전쟁으로 미국이 괌을 획득함.
  • 1898년 6월 25일 - 요세미티산후안 항구를 봉쇄함.
  • 1898년 7월 25일 - 넬슨 A. 마일스 장군과 3,300명의 군인들이 과니카에 상륙하여, 푸에르토리코인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섬을 침략함.
  • 1898년 8월 12일 - 워싱턴에서 미국과 스페인이 평화 의정서(Protocol of Peace)에 서명함. 적대행위가 종료됨.
  • 1898년 12월 10일 - 정식 평화조약에 서명함. 쿠바인들은 참관인(observer)로서만 참석함.
  • 1899년 2월 6일 - 미국에서 평화조약을 비준함.
  • 1899년 4월 11일 - 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휘함. 미국은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포함하는 스페인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을 획득함. 미군정이 실시됨.
  • 1902년 5월 20일 - 쿠바에서 미군정이 종료되고, 시민들의 독립정부가 생김. 대신, 타국과는 동맹을 맺을 수 없고, 관타나모를 영구적으로 미국에게 임대하는 등 미국은 쿠바의 새 정부에 많은 제한들을 부과함.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Monroe Doctrine, 1923” (영어). U.S. Department of State. 2003년 4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일에 확인함. 
  2. Trask, David F. (1996). “The War with Spain in 1898”. ISBN 0803294298. 
  3. American Peace Society (1898). “The Advocate of Peace”. Self-published. 36쪽. 2008년 1월 22일에 확인함. 
    This contemporary remark claims that no attacks were made on the American consulate, etc.
  4. Figuero-Carlos, Javier; García Santa Cecilia (1998년 2월 15일). “España y EEUU aún discrepan” (스페인어). El Mundo. 2009년 3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