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한 페이지

미친 한 페이지』(狂つた一頁、くるったいちぺいじ[4], A Page of Madness)는 1926년(다이쇼 15년) 9월에 공개된 일본무성 영화이다. 감독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주연은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夫). 기누가사가 요코미쓰 리이치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의 신감각파의 문학자와 결성한 신감각파영화연맹(新感覚派映画聯盟)의 제1회 작품으로, 일본 첫 본격적인 전위 영화(아방가르드 영화)이다.[5]. 정신병원을 무대로, 과거의 심적외상으로 정신병을 앓아 입원한 아내를 지키기 위해, 그 병원에서 용인으로 일하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정 비극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광기와 제정신을 교착시키면서 전개된다[6].

미친 한 페이지
狂つた一頁
A Page Of Madness
'웃음의 가면'을 쓰고 춤추는 무희(연기: 미나미 에이코)
감독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각본
제작기누가사 데이노스케
원작가와바타 야스나리
출연
촬영
제작사
  • 신감각파영화연맹(新感覚派映画聯盟)
  • 내셔널 아트 필름사(ナショナルアートフィルム社)[1]
개봉일
  • 1926년 9월 24일 (1926-09-24)(일본)
  • 1975년 4월 27일 (1975-04-27)(일본 (뉴 사운드판))
  • 1975년 1월 (1975-01)(미국)
시간
국가일본
언어일본어(무성 영화, 무자막)

이야기는 마쓰자와 병원을 견학한 기누가사의 제안에 의한 것으로, 가와바타, 기누가사 이누즈카 미노루(犬塚稔), 사와다 반코(沢田晩紅)의 4명의 공동으로 각본이 작성돼, 촬영 종료 후에 가와바타 명의로 시나리오가 잡지에 발표됐다. 기누가사가 프로듀서를 겸임한 자주 제작 영화로 만들어져, 촬영은 1926년(다이쇼 15년) 5월에 쇼치쿠 시모가모 촬영소(松竹下加茂撮影所)를 빌려 행해졌다. 같은 해 9월에 신주쿠무사시노관(武蔵野館) 등의 서양 영화 전용관에서 개봉돼, 영화 평론가나 지식인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적으로는 실패했다[7][8]. 신감각파영화연맹은 본작만을 남기고 해산했으나[7][8], 본작은 그 뒤의 요코미쓰나 가와바타의 몇 개의 작품 묘사나 문체에 영향을 준 면도 있었다[9][10].

1920년대의 유럽의 전위 영화 운동의 조류라고 불리는 작품으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년) 등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나,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영어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5].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한 표현주의적인 조명, 짧은 을 리드미컬하게 이은 수법의 플래시, 플래시백, 오버랩, 클로즈업, 다중 노출 등의 영화적 기법이 구사돼[5][11], 순수한 영상만으로의 표현이 추구되고 있다. 영상의 순수성을 노린 요리미쓰의 제안에 따라, 무성 영화이면서 전편이 무자막으로 됐으나, 실제의 상영에는 변사의 설명이 함께 되었기에, 영상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되지 않고, 그 점은 공개 당시에 지식인에게서 비판당했다[12][13].

공개 후, 본작은 오래간 유실 영화로 생각돼왔으나, 1971년(쇼와 46년) 정월에 기누가사의 자택의 창고에서 우연히 필름이 발견됐다[6]. 기누가사는 스스로 이것을 재편집하고, 새롭게 반주 음악을 넣은 「뉴 사운드판」을 제작하고, 1975년(쇼와 50년) 10월에 이와나미 홀(岩波ホール)에서 일반 공개됐다[6]. 필름의 발견 이후, 프랑스영국, 미국 등의 서양 각국에서도 상영됐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까지 많은 연화사 연구자에 의해,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돼[5], 여러 나라들의 영화계에서 잘 알려진 작품이다[14].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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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한 페이지』의 본편 영상.

참조: [15][16][17][18]

심야의 정신병원. 밖에서는 격하게 비가 내리는 중에, 여성 환자인 무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계속 춤을 춘다. 이 병원에서 용인으로 일하는 노인은 쇠창살이 있는 병실의 앞에 서서, 한 명의 미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은 용인의 아내이나, 광기로 인해 남편을 식별하지 못한다. 용인은 본래 선원으로, 긴 항해 생활로 가정을 돌아보고, 그로 인해 아내는 고독에 괴로워하며, 어린 아이들과 투신 자살을 계획했지만, 아이들만 죽이고 살아남아 발광하고, 이 병원으로 수용됐다. 노인은 자책에 싸여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나, 병원의 사람들은 전원, 그가 환자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다.

다음날 아침, 부부의 딸이 혼담을 알리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나,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과 분노를 느낀다. 딸은 병실로 향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는 어머니에게 실망하고, 어머니를 미치게 한 아버지를 용서할 기분도 들지 않고 병원을 떠난다. 병원에서는 아침 진찰이 행해졌고, 용인은 아내를 진찰하는 의사에게 그녀의 상태를 묻지만, 상대해주지 않는다. 한편, 딸은 병원으로 돌아와, 문지기 소년에게 용인에 대해서 묻는다. 용인은 딸과 재회하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결혼에 대해서 묻는다. 아침 산책을 허락받은 아내는, 잔디밭을 걸으면서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고, 용인과 딸은 살짝 떨어진 곳에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환자 한 명이 딸을 덮치려하자, 딸은 달려서 병원을 빠져나온다.

이후, 병원에서는 무희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고, 그것을 본 다른 환자들이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자, 간수나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돌아오려고 한다. 그러는 중에 한 명의 미치광이가 용인의 아내를 잘못 때려, 격분한 용인과 싸움을 벌이고, 용인은 의사에게 질책당한다. 낮에 선잠을 자던 용인은, 거리의 제비뽑기에서 일등상인 장롱을 뽑아, 딸의 혼례의 축하 선물이 생겼다고 기뻐하며, 딸이 기쁜 듯이 아버지에게 달려오는 환상을 본다. 점심 시간 뒤에, 딸은 아버지를 방문해, 결혼 이야기는 어머니가 미치광이라는 것이 판명나 허물어지고 있다고 하였고, 용인은 결혼을 단념하듯이 타이르자, 딸은 반항적인 태도로 나가버린다.

그날 밤, 용인은 아내를 병원에서 탈출시키려 하고, 남의 눈을 피해서 아내를 병실에서 데리고 나오나, 아내는 어둠을 무서워해 병실로 돌아가버린다. 용인은 간수의 발소리를 듣고 방으로 도망가지만, 그때 문의 열쇠를 떨어뜨려버린다. 그 뒤, 용인은 다시 아내를 데리고 나오려 하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에서는, 용인이 원장이나 미치광이들을 죽이고, 그곳으로 신부 의상을 입은 딸과 신랑 같은 미치광이가 탄 자동차가 달려오며, 아내가 차 앞을 가로막자, 딸은 남편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더욱이 죽였을 터인 원장들이 영구차에 올라타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이어서 용인은, 미치광이나 아내의 얼굴에 차례차례 '웃음의 가면'(노멘 등)을 씌우고, 자신에게도 가면을 씌우는 환상을 본다. 다음날 아침, 아내는 편히 자고 있고, 무희도 여느 때처럼 춤추고 있다. 열쇠를 잃어버린 용인은 아내의 얼굴을 보러 갈 수 없게 되고, 여느 때처럼 묵묵히 복도를 청소한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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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기술이 없는 한은 본편(뉴 사운드판)의 크레딧에 기반한다[19].

제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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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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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감각파영화연맹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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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다이쇼 14년) 10월, 마키노 프로덕션(マキノ・プロダクション)에 소속돼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의 연합영화예술가협회(聯合映画芸術家協会) 제작 하에, 야심적 작품 『태양(日輪)』(히미코를 제재로 한 요코미쓰 리이치의 소설 『태양』 원작)을 감독하고, 이것을 계기로 요코미쓰와 친하게 됐다[23][24]. 그러나, 『태양』은 우익단체에게서 항의를 받고, 마키노 쇼조(牧野省三)의 판단으로 상영 중지로 되고, 기누가사가 마키노 프로덕션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25]. 당시의 일본 영화계에서는 영화 감독이 자주 독립해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드물었지만, 기누가사는 만 30세를 맞이한 다음 해 1926년(다이쇼 15년에 '아무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였고, 또 배우 시대에 쌓여있던 돈이 영화 1편 짜리의 제작 자금으로 되어있던 적도 있어, 마키노 프로덕션에서 나와서 독립했다[24][26].

기누가사는 먼저, 영화 제작에 필요한 카메라를 손에 넣기 위해, 지인인 독일인 청년 앨든버그에게 부탁해, 4000엔 정도의 영화 촬영기파르보 K형(영어판)상하이까지 사러 가게 했다[27][28]. 파르보 K형은 4 개의 렌즈가 붙어있고, 400 피트의 필름을 장전 가능한 카메라로, 본작의 촬영에서도 사용됐다[29]. 더욱이 교토시의 자택에 현상소를 설치하고, 촬영소로 자택 근처의 차나무 밭의 공터를 빌렸다[28][30]. 기누가사가 처음 구상한 작품은 서커스를 무대로 한 노인의 이야기로[주 2], 순회 흥행 서커스의 좌석을 한 개월 전세 내, 차나무 밭의 공터에 서커스단의 천막을 펼치고, 그것을 촬영소 대신으로 촬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31].

1926년(다이쇼 15년) 3월, 기누가사는 새 영화 제작의 상담을 하기 위해,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하야마에서 머물러있던 요코미쓰에게 방문했다[32][33]. 기누가사는 이전부터 신감각파의 작가인 요코미쓰의 실험적인 소설에 관심을 드러내고, 예술적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32][34]. 요코미쓰는 기누가사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동호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타오카 뎃페이(片岡鉄兵),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나, 이케타니 신자부로(池谷信三郎) 등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으로 했다[32][35]. 가와바타는 당시, 『분게이지다이』의 합평회에 출석하기 위해, 체재지인 이즈에서 상경했으나, 4월 2일에 요코미쓰에게서 '영화의 일로 부디 이야기하고 싶으니 얼른 와라'는 전보를 받아, 다음날 3일에 하야마의 요코미쓰에게 방문하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기누가사에게서 「영리를 도외시해 좋은 예술 영화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들었다[32][36]. 가와바타도 계획에 참여하고자 하였고, 가타오카 등을 동료로 넣기 위해, 세 명이서 도쿄로 나와 가타오카의 하숙을 방문했으나 부재중이어서,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묵는 것으로 되었다[37].

4월 10일, 세 명은 도쿄 스테이션 호텔(東京ステーションホテル)에서 가타오카나 기시다와 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다[37]. 이렇게 해서 기누가사와 신감각파 작가인 요코미쓰, 가와바타, 가타오카, 기시다를 구성원으로 하는 영화 제작소인 「신감각파영화연맹(新感覚派映画聯盟)」이 세워지고, 이 영화의 계획을 위해 공동으로 안을 짜는 것으로 되었다[32][33][38]. 신감각파영화연맹이라는 명칭은, 도쿄 스테이션 호텔에서의 회합을 알아낸 『호치 신문(報知新聞)』의 예능 기자인 나카시로 후지오(中代富士夫)가, 4월 11일의 신문에 그것을 알린 때에 멋대로 명명한 것이다[37][39][40]. 가와바타는 4월 말 시점에, 자신들로는 아직 명칭을 정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외에 좋은 명칭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저 편의적으로 신감각파영화연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던 것일 뿐이라고 밝혔고, '제작의 일이 시작할 때까지 외의 좋은 명칭이 찾아지면, 물론 신감각파 운운 등이라 하는 어려운 명칭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41]. 그 후, 신감각파영화연맹이라는 명칭이 독보적이었기에, 어느샌가 정식 제작소명으로 채용됐다[39][40].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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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누가사가 견학한 정신병원인 마쓰자와 병원(1933년).

처음으로 기누가사가 구상하고 있던 서커스와 노인의 이야기는, 요코미쓰나 가와바타 등과 첫 회합을 하는 중에 미뤄지고, 대신 손이 비어있던 기사다 구니오가 『태엽의 장난(ゼンマイの戯れ)』이라는 시나리오를 2일 정도 집필했다[33][42]. 이 시나리오는 특허 마니아의 정년 전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한, 프랑스 풍 풍자가 들어간 소희극이었으나, 영화로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기로 됐다[42][43][주 3]. 거기서 기누가사와 가와바타 등은 신바시의 가라스모리(烏森)에 있는 여관에서 묵으면서 안을 짰으나, 그다지 좋은 안은 나오지 않았다[42][주 4].

그런 어느 날, 기누가사는 요코미쓰 집을 방문하려고 역에서 내렸을 때 본, 정신병에 걸려있다는 어느 고귀한 사람의 일행에 기묘한 인상을 받은 것이 계기로, 문득 아시와라 장군(蘆原将軍、葦原金次郎)이 입원하고 있던 도쿄의 정신병원마쓰자와 병원을 견학하러 갔다[46][6]. 기누가사는 환자의 실태를 보고 이야기의 힌트가 떠올라, 그 밤에 요코미쓰와 가와바타에게 상담을 하고, 정신병원이 무대인 이야기가 안으로 결정됐다[24][46][8]. 시나리오의 집필에는, 요코미쓰는 아내의 간병으로 참가하지 못 했고, 가타오카도 슬럼프로 쓰지 못 했으며, 결국 비어있던 가와바타가 담당하는 것으로 되고, 4월 중순부터 29일까지 모리가사키의(森ヶ崎)의 료칸·다이킨(大金)에 묵으면서 집필했다[43][46][47]. 기누가사도 이때 가와바타와 집필할 예정이었으나, 바빠서 손이 없었다고 한다[8].

그러나, 시나리오의 제1고는, 촬영이 시작할 즈음에 되어서도 완성되지 않았다[47][48]. 4월 29일에 가와바타는 도쿄에서 기누가사에게 집필 도중의 시나리오를 넘기고, 5월의 크랭크 인(촬영 개시) 후에 늦어져서 촬영 현장을 방문했고[49][50], '저 도쿄에서 기누가사 씨에게 도중에 그만 둔 시나리오를 넘긴 채로 되면,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교토로 와있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을 열흘 가까이나 질질 끄는 무책임에, 크게 혼날 각오도, 기누가사 씨가 사양하셔도,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정도도 좋습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51]. 각본이 미완성인 것은, '각본을 진짜로 완성하는 것은, 영화가 완성되고 난 후이다.'라고 생각하는 기누가사에게 있어서 문제가 아니었다[48]. 기누가사는 완성 도중의 시나리오를 받은 후에, 마키노 시대부터 팀으로 하고 있던 각본가의 사와다 반코(沢田晩紅)에게, 그것을 기반으로 한 촬영 대본을 집필시켰다[49][52]. 실제 촬영에서는, 촬영 대본과 그것을 보완하는 촬영 메모가 사용됐으나[53], 촬영 중에도 기누가사, 가와바타, 사와다에 이누즈카 미노루(犬塚稔)를 더한 네 명이서 촬영 대본의 협의가 행해지고, 집필 작업이 이어졌다[50][51][54][주 5].

촬영 종료 후, 가와바타가 촬영 대본과 메모를 기반으로, 가필이나 수정을 한 시나리오를 정리해, 7월 1일에 간행한 『에이가지다이(映画時代)』 창간호에 가와바타의 이름으로 게재했다[52][57][58][주 6]. 단 문말에는 '(이 시나리오는, 기누가사, 이누즈카, 사와다 등 여러 사람에게 힘입은 바가 많고, 덧붙여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기록돼있다[58]. 이러한 경위에서, 공표된 시나리오는 촬영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고, 사후적으로 정리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52]. 또, 가와바타 명의이지만, 만들어지기에는 복수의 인물의 손을 거쳤기에, 가와바타만을 작자로 볼 수는 없고, 네 명의 합작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4][57]. 단, 딸의 아버지가 '용인'이라는 설정은, 가와바타의 전 연인인 이토 하쓰요(伊藤初代)의 경우와 같기에, 이는 가와바타의 발안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고야노는 서술하고 있다[60]. 이 시나리오는 그 뒤, 1958년(쇼와 33년)에 간행한 『키네마 순보 별책 일본 영화 대표 시나리오 전집 2(キネマ旬報別冊 日本映画代表シナリオ全集2)』와 1965년에 간행한 『키네마 순보 별책 일본 영화 시나리오 고전 전집 제1권(キネマ旬報別冊 日本映画シナリオ古典全集 第1巻)』(키네마 준포샤(キネマ旬報社)), 1975年(昭和50年)10月のニュー・サウンド版公開時の岩波ホールのパンフレットに掲載された[61][62][注 1]。『川端康成全集』には、1959年(昭和34年)刊行の新潮社版12巻本の第1巻(11月30日刊)に初収録され、その後1969年(昭和44年)刊行の新潮社版19巻本の第1巻(5月25日刊)、1980年(昭和55年)刊行の新潮社版37巻本の第2巻(10月20日刊)にも再録された[58][63].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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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굴된 영화들 2022(発掘された映画たち2022)”. 일본 국립 영화 아카이브(国立映画アーカイブ). 2022년 7월 13일에 확인함. 
  2. 이시다 히토시(石田仁志) (2020년 3월). 〈무성 영화 '미친 한 페이지' 상영회(無声映画「狂つた一頁」上映会)〉. 요코미쓰 리이치 연구(横光利一研究) (보고서) (일본어). 요코미쓰 리이치 문학회(横光利一文学会). 103-104쪽. doi:10.20822/yokomitsuriichi.2020.18_103. 
  3. 이타가키 2011, 49쪽.
  4. 제로 1998, 표제
  5. 구리쓰보 요시키(栗坪良樹) 「작가 안내-가와바타 야스나리(作家案内―川端康成)」(거리 마쓰리 1996, 290–303쪽)
  6. 이시카와 다쿠미(石川巧) 「미친 한 페이지(狂つた一頁)」(사전 1998, 130–131쪽)
  7. 「후기(あとがき)」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제5권 무지개(川端康成全集第5巻 虹)』신초샤, 1949년 3월). 독영자명 1970, 125–127쪽에 수록
  8. 요미우리 신문 문화부 1969, 81쪽.
  9. 도에다 1999a, 37-38쪽.
  10.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와다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1. 시무라 미요코(志村三代子)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 영화 사전 1 『미친 한 페이지』(川端康成原作映画事典 1『狂った一頁』)」 (가와바타 야스나리 스터디즈 2016, 227–228쪽)
  12. 제로 1998, 73쪽.
  13. 요모타 2016, 211–212쪽.
  14. 데니스 1982, 126쪽
  15. 요모타 2016, 204–206, 220–254쪽.
  16. 「시나리오 『미친 한 페이지』 (シナリオ『狂った一頁』)」 (이와나미 홀 1975, 30–33쪽)
  17. 「작품 소개 『미친 한 페이지』(作品紹介『狂った一頁』)」 (이와나미 홀 1975, 2쪽)
  18. 사토 1986, 30쪽.
  19. 기누가사 데이노스케(감독) (1975). 《미친 한 페이지 뉴 사운드판(狂つた一頁 ニュー・サウンド版)》 (영화). 
  20. 기누가사 1977, 66–67쪽.
  21. “미친 한 페이지(狂った一頁)”. 《소장 영화 필름 검색 시스템(所蔵映画フィルム検索システム)》. 일본 국립 영화 아카이브(国立映画アーカイブ). 2022년 7월 12일에 확인함. 
  22. 이누즈카 2002, 102쪽.
  23. 사토 1986, 28쪽.
  24.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미친 한 페이지』 전말(『狂った一頁』始末)」(이와나미 홀 1975, 8–9쪽)
  25. 스즈키 2001, p. 75; 요모타 2016, p. 192.
  26. 기누가사 1977, 59쪽.
  27. 기누가사 1977, 52쪽.
  28. 가노 1986, 97쪽.
  29. 기누가사 1977, 73쪽.
  30. 기누가사 1977, 60쪽.
  31. 기누가사 1977, 61쪽.
  32. 도에다 1999a, 34쪽.
  33. 요모타 2016, 194–195쪽.
  34. 도에다 2011, 11쪽.
  35. 요미우리 신문 문화부 1969, 79쪽.
  36. 요미우리 신문 문화부 1969, 79–80쪽.
  37. 요미우리 신문 문화부 1969, p. 80; 상세 연보 2016, p. 87.
  38. 도에다 히로카즈(十重田裕一) '신감각파영화연맹(新感覚派映画聯盟)' (세계 영화 대사전 2008, 426쪽)
  39. 스즈키 2001, 84쪽.
  40. 요모타 2016, 197쪽.
  41. 가와바타 야스나리 '신감각파영화연맹에 대해서(新感覚派映画聯盟に就て)' (『요미우리 신문』 1926년 4월 27일·28일·30일). 이와나미 홀 1975, 42–43쪽에 수록
  42. 기누가사 1977, 62–63쪽.
  43. 고야노 2013, 172쪽.
  44. 쇼와여자대학 근대문학연구실(昭和女子大学近代文学研究室) (1956). 《근대 문학 연구 총서(近代文学研究叢書)》 75. 쇼와여자대학 근대문화연구소(昭和女子大学近代文化研究所). 114쪽. 
  45. 《기시다 구니오 전집 제1권 희곡 1(岸田國士全集 第1巻 戯曲1)》. 이와나미 서점. 1989년 11월. 261-318쪽. ISBN 978-4000915311. 
  46. 기누가사 1977, 63–65쪽.
  47. 스즈키 2001, 84–85쪽.
  48. 기누가사 1977, 71쪽.
  49. 가와바타 2010, 37쪽.
  50. 도에다 1999b, 253쪽.
  51.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친 한 페이지』 촬영 일기(『狂った一頁』撮影日記)」 (『주간 아사히』 1926년 5월 30일호〈제9권 제24호〉). 평론 5 1982, 18–24쪽, 이와나미 홀 1975, 43–44쪽에 수록
  52. 도에다 1999b, 254쪽.
  53. 가와바타 2010, 35쪽.
  54. 고야노 2013, 173쪽.
  55. 이누즈카 2002, 88쪽.
  56. 도에다 2011, 34쪽.
  57. 요모타 2016, 214쪽.
  58. 「해제――미친 한 페이지(解題――狂つた一頁)」 (전집 2 1980, 593–594쪽)
  59. 이누즈카 2002, 101쪽.
  60. 고야노 2013, 174쪽.
  6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シナリオ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62. 中谷正尚 (1995년 9월). “衣笠資料整理余話 日本映画史を語る監督の一次資料”. 《放送研究と調査》 (日本放送出版協会) 45 (9): 47.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 (도움말);
  63. 川端康成「狂つた一頁」(全集2 1980, 385–418쪽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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