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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가우의 발트라다(Waldrade of Wormsgau, 835년경 - 869년 4월 9일)는 프랑크 왕국의 귀족이자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후궁이었다. 로타르 2세의 유일한 자녀들을 낳고 로타르는 그녀와 결혼하려 하였으나, 바로 로타르가 죽어 무효화되었다.

생애편집

후궁 시절편집

지역의 소귀족 가문의 딸로 동프랑크 쾰른 (Cologne)의 대주교인 군타르 폰 쾰른의 여동생이며, 아버지는 알사스 백작 프룰라도(Fulrado)였다.[1] · [2] 일찍이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내연녀였으나 로타르 2세의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정식으로 왕궁에 입성하지 못했다.

855년 로타르 1세의 사후 로타르 2세로트링겐을 상속받으면서 첩이 되었다. 왕후 토이드베르가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던 로타르 2세는 그녀가 아들 위그를 낳자, 발트라다를 정식으로 왕비로 삼기 위해 토이드베르가와 여러 번 이혼을 기도하였으나 바티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로타르 2세는 교황의 허락 없이 이혼을 감행했으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았다. 로타르는 아내 토이트베르가를 자신의 친정 오빠와 근친상간했다고 비난하고 재판을 했는데 그녀가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신판(神判)을 이겨내자 858년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이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 루트비히 황제의 지원을 얻었는데, 그는 형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지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로타르는 쾰른 대주교 귄터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사주하여 아헨 2차례 종교회의를 열어 이 결혼을 취소시키고 862년 정부 발트라다와 결혼했다. 이듬해 그는 메츠 종교회의에서 이 결정에 대한 교황 대리의 추인을 받았다.

왕비 책비와 폐위편집

그러나 토이트베르가는 로타르의 숙부 카를 2세의 궁정으로 피신했고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 결정을 번복하고 귄터 대주교와 토이트가우트 대주교를 해임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고 황제 루트비히는 로마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865년 카를과 루트비히는 파문의 위협을 하면서 로타르에게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867년 교황 니콜라오의 뒤를 이어 좀 더 융통성 있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자 로타르는 아내에게 직접 새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토이트베르가가 이혼을 요구하고 나섰다.

로타르 2세의 여러번 설득 끝에 869년 토이드베르가와 이혼한 로타르는 발트라다와 결혼식을 하였다. 로타르가 이혼하게 되자 발트라다는 로트링겐으로 와서 정식 결혼 후 왕비가 되었으나, 로타르는 얼마 뒤 사망했다. 바로 로트링겐을 차지하러 달려온 서프랑크대머리왕 카를 2세동프랑크루트비히 2세는 결혼식의 무효를 선언하고 발트라다와 그녀의 아아들을 모두 사생아로 만든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하였다. 그해 4월 9일에 죽었다.

사후편집

한때 이탈리아 왕을 지낸 프로방스 출신 이탈리아의 위그와 그의 아들 로타리오 3세는 그녀의 외손자와 외증손자였다. 사후 로타르 2세가 묻힌 르미르몽 대성당(Remiremont Abbey)에 안장되었다.

가계편집

관련 항목편집

참조편집

  1. « Waldradam, sororem Guntheri archiepiscopi Coloniensi », dans Cæsarii Heisterbacensis Catalogus Archiepiscopum Coloniensium 94-1230, Fontes rerum Germanicarum tome II, p. 272
  2. Annales Novesienses (annales de Nuitz) Veterum Scriptorum IV, col. 537 : « Guntherus episcopus Coloniensi...sorore...Vastradam...aliis Waldrad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