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량(房元亮)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후잠(后潛), 호는 만회(晩悔)이다.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방계홍(房季弘)의 16세손이고,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7대손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이조참의 방귀온(房貴溫)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방덕유(房德騟)이다.[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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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2]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6촌 형 방원진(房元震), 6촌 동생 방원정(房元井)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산(礪山)에서 회합하여 청주로 나아갔고, 과천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3]

1638년(인조 16년)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로 근무했을 때 부모의 병으로 말미를 받아 남원(南原)으로 내려갔다가[4] 다시 돌아와서 빙고별검(氷庫別檢)이 되었다.[5]

1641년(인조 19년) 의금부 도사(都事)로 재임했을 때 말미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염병(染病)에 걸렸다.[6] 1642년(인조 20년) 11월 24일(경인) 의금부 도사(都事)로서 죄인 이국균(李國均), 선전관 박지용(朴之墉), 도사 정석문(鄭錫文) 등을 잡아왔다.[7]

1642년(인조 20년) 12월 12일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임명되었다.[8][9][10]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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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부 : 방응명(房應明)[11]
    • 부 : 가선대부(嘉善大夫) 방덕유(房德騟)
    • 처부 : 이득원(李得元)[12]
      • 부인 : 함평 이씨(咸平李氏)
        • 아들 : 방세정(房世挺)
        • 며느리 : 반남 박씨(潘南朴氏) - 참판(參判) 박동망(朴東望)의 손녀[13]
    • 처부 : 교동현감(喬桐縣監) 황정열(黃廷說) - 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의 아들[14]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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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원량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사사마방목[만력45년](丁巳司馬榜目[萬曆四十五年])』
  3.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 (1990년)
  4.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10월 11일(경자)
  5.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10월 17일(병오)
  6. 승정원일기》 인조 19년 신사(1641, 숭정14) 5월 6일(경진)
  7. 《승정원일기》 인조 20년 임오(1642, 숭정15) 11월 24일(경인)
  8. 《승정원일기》 인조 20년 임오(1642, 숭정15) 12월 12일(정축)
  9. 《승정원일기》 인조 20년 임오(1642, 숭정15) 12월 13일(무인)
  10. 《인조실록》 45권, 22년(1644 갑신 / 명 숭정(崇禎) 17년) 11월 4일(무자) 1번째 기사
  11. “남양 방씨 족보 - 한국학자료센터”.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8월 7일에 확인함. 
  12. 『함평이씨족보(咸平李氏族譜)』 (1896년)
  13.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방세정의 처 박씨(房世挺의 妻 朴氏)
  14. 《국조인물고》 권54 황진(黃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