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숙(邊(邉)肅, ?~1399년)은 고려의 관료이자 원주 변씨 전서공파의 파조이다. 변안렬과 변숙은 숙부와 조카 관계이다. 변안렬은 원주 변씨 시조이다.

변숙
邊(邉)肅
고려의 가정대부(嘉靖大夫)호부전서(戶部典書)
군주 고려 공민왕
이름
자엄(子嚴)
모려당(慕麗堂)
시호 문절(文節)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원나라 심양
사망일 1399년
사망지 고려 배천
국적 고려
성별 남성
부친 변안백(邊(邉)安伯)
자녀 변을충(邊(邉)乙忠)
묘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연안군
웹사이트 원주변씨 전서공파

변숙은 변안렬의 형인 변안백(邊(邉)安伯)의 둘째 아들이며 변량(邊(邉)諒)의 첫째 아들이 변안백(邊(邉)安伯)이고 둘째 아들이 변안렬(邊(邉)安烈)이다. 변안백(邊(邉)安伯)은 원나라에서 심양후(瀋陽侯)를 지냈다. 변량(邊(邉)諒)은 변순(邊(邉)順)의 아들이고, 고려에서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판삼사 상호군를 지냈다.

생애 편집

• 변숙(邊(邉)肅)이 변안렬로부터 명을 받아 원주 변씨 본관을 원주로 하였다. 변숙의 자(字)가 자엄(子嚴)이고 호(號)가 모려당(慕麗堂, '당' 은 호의 붙이는 존칭)이고 시호(諡號) 또는 휘(諱)가 문절(文節)이다

• 1351년(지정至正 신묘년辛卯年)에 노국공주가 고려에 올 때 변안렬이 수장이었다. 변숙은 제6학사로서 고려에 왔다. 그리고 변숙은 고려에서 '가정대부(嘉靖大夫)'의 '호부전서(戶部典書)'에 이르렀다. 호부는 조세 및 국가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는 부서이고, 전서는 현재 장관에 해당된다.

• 변숙은 고려의 장래가 위태할 때 변숙과 조림맹은 고려 왕 공민에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변숙과 정몽주는 서로 의지하고 함께 했던 사람이라고, 변숙은 슬퍼했다. 정몽주(鄭夢周)의 아호는 포은이다. 태조(이성계)가 이를 알고 변숙의 처와 자식을 감옥에 가두었고, 변숙은 아들, 변을충과 서쪽에 있는 벽란진을 건너갔다. 변숙은 고려가 망하자 왕을 두명 모실수 없다는 충절을 지켜, 배천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려절사(慕麗節士)라 하였다.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모려절사(慕麗節士)란 고려를 동경하고, 절개를 지킨다는 뜻이다.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 옛지명이다.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킨다. 두문동칠십이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었다. 묘소는 연안군 동면 용수산 동쪽 기슭에 있는 재경동(개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변숙은 1399년에 사망했다.

후손 편집

전서공파(典書公派) 후손인 변숙(邊(邉)肅)의 후손은 원주 변씨 전서공파 21세대(원주 변씨 22세대)인 변응주까지 600년 이상을 지금의 개성(또는 개풍 또는 연백)에 살았다. 변숙의 후손은 변을충, 변확(호조참의), 변자정(호조참의), 변위(좌찬성), 변량보(첨중추), 변수(호조참판)로 이어지고 변량보(邊(邉)良輔)는 원주 변씨 전서공파(典書公派) 중 첨지공파(僉知公派)의 시조이다. 다음 세대로는 변이진(병조참의), 변환(통덕랑), 변상담(첨중추), 변문, 변한국, 변경인(통덕랑), 변태화, 변동우, 변지현, 변석연, 변승필, 변형식, 변희풍, 변응주으로 이어졌다. 변이진(邊(邉)以震)은 전라좌수우후(全羅左水虞侯)로서 1640년 2월 16일 (인조18: 경진) 바다에서 왜적을 만나 영암 칠산(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에서 순절하였다. 변응주(邊(邉)應周)는 한국전쟁 때, KLO(Korea Liaison Office)부대에서 근무했으며, 아모레퍼시픽(주)을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