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완혁(夫琓爀, 1919년 3월 1일~1984년 12월 31일[1])은 대한민국관료, 언론인, 기업인이다. 미군정기 때 잠시 학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960년대 이후 사상계를 인수하여 맡아보기도 했다. 경성부 출신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부완혁
출생1919년 3월 1일(1919-03-01)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망1984년 12월 31일(1984-12-31)(65세)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본관제주

생애 편집

초기 활동 편집

경성부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 1941년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선산군 군수를 지내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 편집

관료 활동 편집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1948년 국무총리 이범석의 비서관이 되면서 다시 관계로 돌아갔다. 1952년에는 기획처 물동국장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1955년에 관계를 떠나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면서 경제 전문가 출신 언론인으로 유명해졌다. 4·19 혁명 후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곧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재야로 돌아갔다.

정치 활동 편집

제3공화국에서는 《사상계》에 기고하며 문필 생활을 하였고, 1967년에는 신민당에도 입당하여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장준하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뒤 그에게 사상계를 넘겼다.[2] 그러나 강원용에 의하면 전임자인 장준하와 갈등했다고 한다.[2]

부완혁이 사상계 발행인을 맡아 경영하던 중, 1970년에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김지하의 담시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가 폐간되었다.

만년 편집

1976년에는 맏사위 신선호가 설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맡아 경영인으로의 변신을 꾀했으나 회사가 해체되어 성공하지 못했다.[3] 저서로 《신제국주의》, 《국제공산당과 세계혁명》 등이 있다.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각주 편집

  1. “조선일보 전 주필 부완혁씨 별세”. 조선일보. 1985년 1월 1일. 7면면. 
  2.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Archived 2007년 8월 31일 - 웨이백 머신 신동아 2004년 3월호(534호)
  3. 이나리 (2000년 12월). “[추적취재] 율산 再起 8857일의 기록 - 집념의 신선호,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신동아》.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