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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합니다 (토론) 2016년 3월 16일 (수) 14:32 (KST)답변

고려말 개혁정치가 李春富(이춘부) 편집

◉ 正史에 기록된 양성부원군 문하시중 諱 春富

이춘부(李春富) ?~1371(공민왕 20년) 
고려조 충정왕(忠定王)․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관직은 충근절의벽상삼한 동덕찬화공신 특진삼중대광문하시중 판선부사 영효사관사 양성부원군 동북면도원수(忠勤節義壁上三韓 同德贊化功臣 特進三重大匡門下侍中 判選部事 領孝思觀事 陽城府院君 東北面都元帥),

公은 고려의 광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 양성군 수방(守邦 : 일명 那海)과 정경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흥군(義興君) 자흥(子興)의 따님≫의 장남으로 송경(松京-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지신사(知申事).우대언(右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1358년(공민왕 7년)서강 병마사(西江兵馬使)로서 왜구의 침입을 격퇴했다.

이듬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오르고 1360년(공민왕 9년)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를 거쳐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王都 開城이 함락되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全羅道都巡檢兼兵馬使)로 이를 물리쳐 수성보절일등공신(輸誠保節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후 1367년(공민왕 16년)충근절의 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으로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삼중대광 도첨의 시중(三重大匡都僉議侍中)에 올랐다.

배위는 정경부인 양천허씨 (陽川許氏)≪찬성사 선(僐)의 따님, 대사성 부령 김승인(扶寧 金承印)의 외손≫,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옥(沃)은 좌상시,강릉도절제사,차남 빈(斌)은 진주목사, 3남 예(裔)는 대사간, 4남 한(澣)은 판사복시사, 5남 징(澂)은 삼사우윤 판군기시사. 외동딸은 인재공 한산 이종학(韓山 李種學)에게 출가하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왕조사, 고려시대사, 용재총화,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양성이씨 대동보 및 명현록.  


◉ 각종 사료를 통해 분석해 본 李春富

격동기인 고려말 정치상황을 이야기 할 때 侍中 李春富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이춘부를 직접 검색하지 않고 공민왕 또는 신돈을 검색해도 이춘부에 대한 대략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이춘부는 공민왕, 신돈과 함께 고려말 政治地圖에서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高麗國은 크게 前半期와 後半期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광종의 왕권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에 이어 제6대 성종의 유학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 그리고 제11대 문종의 태평성대와 제14대 숙종의 철권통치를 정점으로 점차 安樂에 빠져 18대 의종대에 이르러 결국 武臣亂을 당해 왕권을 잃고 만다.

그후 왕들은 있으나 마나 한 신세가 되고 무신난을 평정한 최충이 60여년간을 집권하는 사이 「징키스칸-테무진」이 開國한 몽고가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중국 宋나라까지 멸망시키며 元나라를 세운다. 
최씨의 무신정권은 삼별초로 까지 分派되며 끝까지 대몽항쟁에 나섰으나 결국 제25대 충렬왕 부터는 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앞에 충(忠)이란 글자가 붙는 수모를 겪는다.

6代에 걸친 忠자 돌림의 왕에 종지부를 찍은 임금이 바로 제31대 공민왕인데 이 때는 이미 元나라도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중원 땅엔 새로운 왕국인 明나라가 태동하는 격변기였다.

형과 어린 조카들이 왕위에 오르며 원나라에 불려갔던 강릉대군(공민왕)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고려왕국을 다시 부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구상하게 된다. 

어린 조카들의 뒤를 이어 22세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우선 기철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몰아내고 고려가 자주국가임을 선포한다.

즉, 元순제의 연호인 至正을 쓰지 않기로 하고 선왕에게 올리는 시호와 국가의 제사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한다고 공포한 것이다(1356년 공민왕 5) 

이 때 내린 교명 가운데 내정에 관련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서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둘째,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하였다. 셋째, 조세 부정과 불법을 제거하는 조치를 내렸다. 넷째, 낭비 등 일반적인 비리를 없애고 누에치기와 삼 재배를 장려하였다. 다섯째, 군사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부원세력들의 끈질긴 저항, 조일신과 김용의 亂 등을 겪으며 개혁드라이브 정책에 제동이 걸린 공민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까지 잃게 되자 한 때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승려 「신돈」인 것이다. [동사강목] 공민왕 편에 보면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일가 친척이 뿌리를 뻗어 서로 가리고 덮어주고 초야의 新進은 실상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망을 취하여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顯官이 되면 대족과 혼인하여 그 처음의 뜻을 깡그리 버리고 儒生은 나약하여 굳셈이 적고 게다가 門生이니 座主니 同年이니 하면서 서로 부르며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정리에 따른다.

이 세 部類를 모두 쓸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세상을 떠나 우뚝 서 있는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즈음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道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대로 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신돈에게 중책을 맡기려 했는데 신돈은 덮석 공민왕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뒷날을 위해 다짐을 받는다.

“일찌기 듣건대 임금께서는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니 삼가서 이와같이 하지 말아야 世間을 복되게 하고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공민왕은 손수 맹세의 말을 썼다. “스승은 나를 救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을 두고 맹세하오. 이것으로 남의 말에 迷惑됨이 없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오” 하였다. 이로서 공민왕은 신돈에게 全卷을 맡기면서 그 後援者로 비록 권문세가에 속하지만 나라를 구할 의지와 곧은 성품의 소유자인 이춘부와 이색, 이인임 등을 추천했다.

이춘부는 이미 공민왕이 즉위하기 이전, 정3품 벼슬인 지신사, 우대언,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공민왕 7년 서강병마사로서 왜구를 격퇴한 바 있고 공민왕 9년에는 동강도병마사를 거쳐 그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로 이를 물리쳐 수성보절 일등공신에 책록된 文武 겸비한 나라의 큰 일꾼이였다.
그리고 李穡은 공민왕과 비슷한 연령대로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한 보기드믄 유학자로 역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곧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신돈에게 가해질 유학자들의 압력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권문세가이지만 위 세 부류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들로 신돈을 후원하게 하고 신돈을 앞세워 강력한 개혁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약 7년간 강력하고도 다각적인 개혁정책을 펼친 신돈 정권은 그러나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충숙왕의 妃-공원왕후 홍씨)와 그의 인척인 김원명, 김속명 형제 그리고 기득권을 잃은 보수파 권문세족들의 집단적 반발과 공민왕의 개혁의지 상실과 겹쳐 결국 역모죄로 몰아 수원으로 유배시켜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 때 공민왕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었었고 신돈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후원했던 이춘부 등도 마침내 제거하기에 이른다. 
올곧은 관료들을 대거 제거한 공민왕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과거 元나라에 있을 때 본 라마교를 흉내 내며 변태적인 행동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젊고 여자처럼 생긴 귀족 아들들을 뽑아 곁에 두고 왕비를 강간하게 하는 등 변태적인 행동을 일삼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만일 신돈의 개혁정책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더 강력하게 밀어 부쳤거나 권문세족 가운데 신망이 두터웠던 이춘부 등을 신돈과 함께 제거하지 않고 계속 중용했다면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을 것이고 고려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自主的이고 남녀 차별 없이 自由가 많이 보장되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왕국도 신돈과 이춘부 등을 앞세운 공민왕의 마지막 개혁정책의 실패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고려말 강력한 개혁 정치가의 一員인 李春富는 제거된 그 이듬해 장남인 李沃이 강릉 일대에 침입한 왜적을 섬멸한 功으로 얼마 후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춘부가 태어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인 1349년 이미 종3품~정3품 벼슬인 지신사, 우대언, 밀직부사,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했고 1360년 동강도병마사로서 서강병마사인 이자춘 보다 벼슬이 조금 앞선 것으로 분석해 볼 때 1310년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 2016년 3월 16일 (수) 15:14 (KST)

1372년 이옥의 강릉전투에 관한 고찰 편집

1372년 이옥의 강릉전투에 관한 고찰

서 론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왜구의 침입은 1350년(충정왕 2년)부터이며, 이후 더욱 심해져 공민왕 때는 동해ㆍ황해ㆍ남해의 연안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의 치안까지 위협하였고, 우왕 때는 14년 동안 무려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에서는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써서 여러 차례 소탕하기도 했는데, 고려 말 왜구와 싸워 이를 물리친 기록은 여럿 있다. 우선 1376년 최영(崔瑩)의 홍산대첩(鴻山大捷)을 비롯하여 1380년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鎭浦)싸움, 같은해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荒山大捷), 1383년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화약 및 화통·화포(火砲) 등의 화기를 만들어 진포싸움과 남해대첩을 대승으로 이끄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리나 고려는 원(元)나라의 2차에 걸친 일본원정의 기지로서 과중한 부담을 치러 경제적 파탄에 이르렀고,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정치ㆍ경제 등 모든 면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이는 고려가 멸망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위에 열거한 대첩들은 대부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단편으로 기록된 사실을 후세에 작가들이 내용을 더 충실히 하여 오늘날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못지않게 드라마틱한(力動的) 기사가 있다. 바로 1372년 이옥의 강릉전투인데, 정사와 야사에 반복되어 기록하고 있는데도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를 당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조명해 보기로 한다. 이옥의 강릉전투가 중요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구도에서 왜구의 위치가 매우 주목받는 가운데 강릉을 비롯한 영덕, 덕원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침공한 왜구를 관노(官奴)가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지적으로 남해안 일대에 침략한 왜구나 중앙정부군(송도 조정의 군사력)의 영향력 범위 내에 있는 중부 서해안 침공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등한 군사력으로 맞붙어 치룬 전투와 달리 이옥의 강릉전투는 연전연패하는 가운데 마지막 수단으로 이옥의 출중한 활솜씨에 의지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 전투의 중요성 때문에 아조(我朝)라는 표현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기술한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도 그 기사가 절제된 표현으로 남아있었던 것이고, 용재총화에는 좀 더 충실한 내용으로 기술된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강릉전투 때 안렴사였던 김구용과 적을 물리친 이옥이 아들 대(代)에 사돈을 맺어 그 후 이옥의 손자 代에서 절손될 위기에 처하자 무려 5백년이 넘도록 김구용의 후손 가문에서 이옥 아들(이사검)의 시제사를 모셔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구용과 이옥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고,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이 전투가 갖는 비중이 나름대로 상당히 컸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잊혀진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이 기사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본 론

1. 정사(正史) 및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옥의 강릉전투

‘왜적이 강릉부와 영덕, 덕원의 두 고을에 쳐들어왔다. 이 때 이춘부의 아들 옥이 몰수되어 동계의 관노가 되었는데 왜적이 쳐들어오니 우리 군사는 풍문만 듣고도 패하여 달아났다. 부사와 안렴사가 옥이 용맹스럽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주어 이를 치게 하니 옥이 힘을 다하여 싸워 적을 물리쳤다. 왕이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고 그 역을 면하여 주었다. 高麗史節要 卷之二十九 恭愍王四 壬子二十一年 大明洪武五年 倭寇江陵府 及 盈德原二縣 時, 李春富子沃 沒爲東界官奴 及倭寇至 我軍望風奔潰 府使按廉 聞沃勇銳 授兵使擊之 沃, 力戰却之 王賜鞍馬 免其役

이춘부의 아우 원부는 응양군상장군으로 광부는 승선으로 되어 삼형제가 모두 요직에 있었으며 일가 친척들이 높은 자리에 많이 있었다. 이춘부가 처단된 후 이원부 이광부도 신돈의 도당으로 인정되어 외지로 귀양갔으며 춘부의 아들 옥과 빈, 예, 한, 징도 모두 관노로 편입되어 각 주군에 예속되었다. 그중 옥은 강릉에 예속되었었는데 왜적이 동계를 침략하여 아군이 바람소리만 듣고도 도망쳤다. 평소에 이옥의 용맹을 알고 있던 안렴사가 그에게 병정을 주어 왜적을 치게하였다. 이옥이 역전하여서 왜적을 격퇴하여 강릉일대는 그 덕으로 전재를 면하였다. 왕이 듣고 이옥에게 말과 안장을 주고 그의 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후 신우(禑王)가 이춘부의 告身을 주었다. 高麗史 卷第125 열전 李春富傳中에서 끝부분 春富弟元富. 鷹揚軍上將軍 光富. 承宣 兄弟三人皆據權要宗族多居 顯列春富誅元富光富亦以旽黨流干外 春富子沃斌裔澣澂並沒. 奴分隸州郡 沃. 江陵倭寇東界 我軍望風奔潰 沃素以勇聞 按廉授兵使 擊賊沃力戰却之 江陵一境賴以免 事聞賜鞍馬免其役 後辛禑給春富告身

다음은 용제총화(慵齊叢話)에 있는 李沃에 관한 記事 “이옥은 侍中 春富의 아들이다. 시중이 誅殺당하자 이옥은 강릉부의 병졸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에 왜구가 동해에 몰려와서 州郡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피하였다. 府의 앞뜰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이옥이 밤사이에 사람을 시켜 화살 수백개를 나무에 꽂아 놓았다. 이튿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해구로 나가 몇 개의 화살을 적에게 쏘고는 거짓 패한 체하면서 나무 사이로 달려 들어가니 왜적이 구름과 같이 몰려왔다. 혼자서 당해내는데 꽃혔던 화살을 뽑아 쏘며 종횡으로 달리며 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전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시위를 헛되게 당기지 아니하여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으니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이 군의 지경을 범하지 못하여 한 道가 그의 힘으로 편안하니 조정이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註①)

고려사절요 및 고려사 그리고 용재총화에 실린 기사들을 재구성해보면 1372년 6월 왜구가 동해안 일대를 침범했는데 우리 군사는 연전연패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다. 이 때 마침 활을 잘 쏘아 왕으로부터 안마를 하사받은 바 있는(註②) 이옥이 강릉부 관노로 와 있음을 알고 부사와 안렴사가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이옥에게 군사를 주어 치게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와 안종원 등의 졸기를 보면, 1371년 안종원은 강릉부사로, 김구용은 강릉도안렴사로 발령난 기사가 있다. 이들은 문장(文章)도 출중하고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줄 만큼 선정을 베풀었지만, 전형적인 문인이라 대규모로 침공한 왜구를 맞이하여 대처할 능력은 없었다. 이에 얼마 전까지 문하시중의 아들이고 활을 잘 쏘며 군사를 잘 다룬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비록 관노의 위치에 있었지만 과감하게 군사를 맡겨 적을 물리치게 한 것이다. 기사에는 숲에 많은 화살을 감추어 두고 적을 유인하여 백발백중 명중시켰다고 했는데, 숲에는 많은 군사들이 매복되어 있는 것처럼 적의 눈을 속이고 적의 주력부대를 숲 가까이 유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은페(隱閉)된 상태에서 미리 감추어 둔 화살로 적의 우두머리들을 쓰러뜨린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전투에서 지휘자가 죽으면 급격히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동해안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처들어 온 대규모 선단의 왜구였다 하더라도 주력부대는 관청이 있는 강릉부로 몰렸을 것이고 강릉부만 접수하면 영동지역은 지정학적으로 한동안 그들의 점령지가 되어 개성의 중앙정부에서도 쉽게 되찾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이 절대절명(絶大絶命)의 위기에서 부사 안종원과 안렴사 김구용이 이옥에게 적의 주력부대를 활로 방어해 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고 이옥은 평소 갈고 닦은 명궁실력으로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활로 우두머리급 왜구들을 쏘아 맞춘 것이다. 주력부대에서 대장과 참모들을 잃은 왜구는 급히 퇴거를 서둘렀을 것이고 다른 지역에 주둔해 있던 같은 무리의 왜구들도 부랴부랴 도망가며 강릉에 신궁(神弓)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렸을 것이다.

2. 14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사정

1. 고려의 사정 동아시아에서 14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유라시아를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元)제국이 쇠퇴하고 중국 대륙에는 새로운 왕국(明)이 생성되는 시기였고, 바다 건너 일본은 최초의 중세국가라 할 수 있는 가마쿠라(鎌倉)막부가 무너지고(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체제인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을 잠시 거쳐 남북조시대(1336년~1392년)로 들어간다. 중앙정치가 극도로 혼란해짐에 따라 소위 떠돌이 무사집단이라 하는 악당(惡黨)들이 들끓던 시기였다. 한편 고려도 元의 부마국(나쁘게 말해 屬國)으로 전락하여 부원세력이 판치는 가운데 원나라의 쇠퇴(衰退)를 틈타 공민왕이라는 개혁적인 국왕이 등장하여 왕권을 되찾고 자주국으로 독립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훗날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은 10대 시절부터 연경에 볼모로 잡혀와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 주변의 정세를 낱낱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강릉대군이 왕위에 오를 때에 기황후나 박불화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렇다고 이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아마 어릴 적에 고임을 받은 것으로 보아 기황후나 박불화의 지원을 받았을 높았다. 뒷날 기황후 일족을 반역으로 몰아 죽이면서도 자신을 핍박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강릉대군은 영특하고 신중하여 원나라에서 많은 칭송을 들었다. 충목왕이 죽었을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충정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도 그를 왕으로 추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강릉대군은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연경에 살면서 아무런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 조정이 황제파나 황태자파로 갈라져 싸울 때에도 정치적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강릉대군은 1348년 원의 유력한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과 혼인을 맺었다.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질투나 오만을 부리지 않았으며, 부덕을 갖춘 여자로 칭송을 받았다. 원나라는 그에게 심왕(瀋王)의 자리를 내려 요동 일대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를 고려의 제2인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의 신중한 처신은 그에게 왕위를 가져다주었다. 멀쩡하게 현왕이 살아 있었으나 그가 아니면 고려를 이끌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순제나 기황후의 눈에 든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원나라는 호랑이를 길러 우리 밖으로 내보낸 꼴이 되었다. 공민왕은 당당한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는 당시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의지에 따라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고, 나름대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당시 지정학적으로 중간에 위치해 있던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은 물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려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 안팍으로 힘겨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고려후기 가장 개혁적인 군주였던 공민왕도 이토록 국내외적인 정세가 불안정하다 보니 몇 차례의 개혁정책을 시도해 보고 벽에 부딪치자, 마지막으로 개혁성과 어느 부류에도 얽히지 않고 민본의 성향까지 갖춘 ‘신돈’을 앞세워 강력한 개혁드라이브 정책을 펼쳤으나 또다시 母后(명덕태후 홍씨)까지 등에 업은 권문세가들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스스로 개혁정책을 맡기고 지원했던 신돈 등 개혁관료들을 대거 제거하고 자신도 個人的인 일(註③)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개혁관료들을 제거할 때 문하시중 이춘부도 신돈의 도당으로 몰려 주살당했다. 한편 변방 출신의 무장(武將)인 이성계 장군이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하여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력을 획득한 뒤, 거의 무혈입성하다시피 하며 새왕조로 바꾼 것도 이러한 혼란스런 국내외 정세 때문에 가능했다.

2. 元나라의 쇠퇴와 홍건적의 등장 1351년 원의 순제(順帝)는 강릉대군(江陵大君)을 고려 왕으로 재가하였다. 당시 충정왕(忠定王)은 열두 살의 나이로 간신히 왕위를 지키는 형편이었다. 충정왕은 아홉 살에 왕위를 이었는데 말할 나위도 없이 권신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순제는 고려 왕실이 너무 미약해 험난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고 여겨 강릉대군을 새 왕으로 삼은 것이다. 순제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명종이 옛 몽골 땅을 여행하다가 여인을 얻어 제2 황후로 삼았는데, 이 황후가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다. 명종이 죽은 뒤 외아들인 순제가 황제의 위에 오르지 못하고, 명종의 아우 문종이 황제가 되었다. 권력다툼에 밀려나 소외된 순제는 고려 땅인 대청도로 귀양살이를 떠나는 운명에 놓였다. 당시 순제의 어머니가 그를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소문을 냈다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권신인 옌테무르가 모든 실권을 쥐고 흔들었다. 옌테무르는 명종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문종을 황제로 삼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거짓말을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3년 만에 죽었다. 또한 문종의 아들 영종이 제위에 오른 지 50일 만에 죽자, 열세 살 된 순제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되었다. 옌테무르는 순제가 몽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막북파(漠北派 : 몽골 내지의 세력)의 지지를 받을 것이 두려웠다. 옌테무르는 한지파(漢地派)였다. 순제는 새로운 유배지 광서에서 돌아오는 도중에도 암살될 위험에 처하였으나 철저한 호위 덕분에 무사히 연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옌테무르는 순제가 즉위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 대신 바얀(伯顔)이 실권을 잡았다. 바얀은 철저한 막북파였다. 그는 어린 순제를 받들어 한지파를 몰아내고, 부활되었던 과거제도 즉시 철폐하였다. 바얀은 중국의 세력 있는 대성(大姓)을 모조리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어 친정을 단행하게 된 순제는 바얀을 쫓아냈다. 이어서 한지파인 톡토가 실권을 잡았다. 다시 과거제가 실시되고 각계 각층에 중국인들이 등장하였다. 순제는 온건하고 나약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에 남다른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기씨를 총애한 끝에 제2 황후로 책봉하고, 기황후가 외아들 아요르시리다라를 낳자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기황후는 아름답고 지략이 뛰어나며 예절 바르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궁중 내에서는 물론 벼슬아치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하였다. 순제는 30대 중반에 황태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라마교에 빠져들었다. 라마교는 밀교(密敎)로 빠져 오래 전부터 비밀 의식이 전수되어왔다. 특히 방중비술(房中秘術)로 유명하였다. 순제는 환락에 빠져들었고, 궁중에서 라마교 의식을 사흘거리로 치러댔다. 사흘마다 한 번씩 열리는 라마교 불회(佛會)에서는 양 1만 마리를 희생으로 잡았다. 또 절과 탑을 짓기 위해 교초(交鈔 : 어음 또는 지폐)를 마구 발행하는 바람에 물가가 뛰어올라 끝내 교초는 휴지 조각이 되고, 원나라 말기 50여 년 동안 물가가 500배나 치솟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사치와 낭비 풍조는 궁중의 재물을 마르게 했다. 원나라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반대급부로 세금은 더 가혹해졌다. 세금징수 대상은 주로 농업 지역인 중국의 남쪽 지대였다. 궁중은 막북파와 한지파의 분쟁에서 황제파와 황태자파로 갈라져 내분을 거듭했다. 황태자파에는 기황후와 고려 출신의 환관이 박불화(朴不花)와 원의 일부 고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태자파는 순제를 밀어내고 황태자를 즉위시키려 하였고, 황제파는 결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하였다. 박불화는 대단한 음모가였다. 그는 좌승상인 태평(太平)을 끌어들이려고 공작을 벌였다. 태평이 한사코 거절하자 기황후가 그를 죽여버렸다. 그뒤 원의 군벌(軍閥)들이 각기 황제파와 황태자파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군벌들도 정치적 줄을 대서 살길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 갈등은 뒷날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원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 무렵 강남 지역에서 연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이곳 저곳에서 소규모로 일어난 무리들은 거침없이 관아를 습격하였다. 다른 세력과 아울러 규모가 조금 커지면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사용하면서 원에 맞섰다. 원나라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에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내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반란세력 가운데 백련교도(白蓮敎徒)도 있었다. 이들은 불교의 한 유파로 미륵세상을 표방했다. 두목 한산동(韓山童)은 스스로 미륵이라고 뽐내면서 교도들을 모아들였다. 원나라 조정이 라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백련교도들이 민심을 모을 때 라마교와 싸우자는 것도 하나의 선동 수단이 되었다. 뒷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소년의 나이로 이 대열에 끼여들어 행운을 누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3. 무사들의 혈투가 시작된 일본열도 일본의 사정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여원(麗元) 연합군을 물리친 뒤 안정을 누렸다. 일본인들은 무사이든 평민이든 가릴 것 없이 원과 고려를 원구(元寇)라 부르면서 적개심을 불태우고 복수심을 길렀다. 그러나 막부는 영주들에게 수탈당하는 중소 지주들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였고, 무사 계급도 몰락을 거듭하였다. 14세기에 들어 ‘악당’(惡黨)이라고 불리는 무력 집단이 떼를 지어 횡행하였다. 악당들의 행패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해적질을 하거나 강도짓을 일삼았다. 악당들은 적갈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머리에는 여자 갓을 썼으며, 두건을 두르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바구니에 화살을 넣어 지고 다녔으며, 자루가 벗겨진 화살을 허리에 차고, 대로 만든 창과 단단한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이들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상한 차림을 하고 다니면서 한사코 얼굴을 감추었다. 악당들은 막부와 영주에게 저항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후기에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게릴라 전술을 썼다. 막부에서는 1319년에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여 이들의 기세를 꺾었다. 그러나 5년쯤 지나자 또다시 50명 또는 100여 명씩을 떼를 지어 다녔다. 이 무렵에는 좋은 말을 탔으며, 마구와 무기에 금박을 하고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다녔다. 악당들은 토지 분쟁에도 개입했고 돈을 받고 싸움판에 나섰으며 사람을 잡아 가두고 약탈을 자행하면서 장원을 장악했다. 이들의 세력은 막부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 막부에 눌려 지내던 고다이고천황은 이들을 후원하고 나섰다. 이 무렵 황실은 두 세력으로 갈라졌는데, 막부에서는 번갈아 천황이 되도록 조정하였다. 고다이고천황은 주자학의 명분론을 내세우며 친정을 추구하였다. 그는 모든 정사는 천황의 손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악당들이 횡행하여 지배체제가 흔들렸지만 막부에서는 재빨리 조처하여 고다이고천황을 오키섬으로 유배보냈다. 1332년 고다이고의 아들인 모리나가가 악당과 무사들을 모아들여 봉기하자 막부 측에서 대군을 동원하여 맞섰다. 이 틈을 타 탈출한 고다이고천황이 막부의 중심지인 교토를 공격하였다. 결국 가마쿠라막부는 멸망하였다. 그뒤 천황에게로 모든 권력이 돌아가자 무사들은 토지 등 기득권을 보장받지 못해 불만에 가득 찼다. 다시 정권 투쟁이 벌어졌다. 1335년에 고다이고는 교토를 탈출해 요시노(古野 : 나라 현 중부의 산악 지대)로 달아나서 남조(南朝)를 열었고, 교토에는 다른 황실세력인 고묘(光明)천황이 눌러 앉아 북조(北朝)를 열었다. 두 세력은 60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1392년에 남조가 북조에 흡수되었다. 왜구의 침입은 전기와 후기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350년 이전에 고려에 침입한 왜구는 소규모의 도둑데들이었다. 하지만 1360년대 이후의 왜구들은 적을 때는 두세 척, 많을 때는 수백 척의 배를 타고 몰려들었으며, 해를 거르지 않고 침입했다. 왜구는 한반도 연안까지 들어왔는데 1372년 동해안 일대에 대규모로 침공한 왜구도 바로 그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주로 일본 열도인 쓰시마섬과 이키섬을 전진기지로 한 규슈, 나가사키 북부 지방의 주민들이었다. 악당과 몰락한 무사들도 이들 무리에 끼여들었다. 왜구는 악당과 같은 차림을 하고 침구하여 식량, 옷감, 보물 따위를 약탈하고 주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고려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도둑을 막아달라는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남북조의 내란으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 왜구들을 막는 일로 나날을 지새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가운데 왜구(倭寇)라 통칭하는 일본 연안의 집단 떠돌이 침입자들은 초기에는 2~3척의 소규모였지만 점점 증가하여 20~30척으로 늘고 많을 경우에는 200척에서 500여척의 대규모 선단(船團)을 거느리고 우리 고려의 영토와 멀리 중국 연안까지 침입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던 큰 골치덩어리였는데 그 위세는 가히 한 나라를 전복시킬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왜구가 최초로 우리 고려에 침입해(김해지방) 노략질 한 때는 1223년(고려 고종 10년) 5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 40여년 동안 더 이상 출몰하지 않다가 원종 때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왜구가 크게 문제가 된 때는 1350년(충정왕 2년)부터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해에 왜가 고성, 죽림, 거제를 노략질 했다. 왜구의 침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14세기 중엽에 본격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구는 공민왕대에 들어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1358년(공민왕 7년) 7월에는 왜구가 강화도 교동에 침략하여 개경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어 1360년에는 왜구가 강화에 침입하여 300여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가기도 했다. 그 후 700여 기병과 보병 2천여 명의 대규모 침공도 있었다. 이 시기(일본의 남북조시대)의 왜구는 단순한 약탈자들이 아닌 일본 중앙정부의 혼란을 틈타 국가를 전복시키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야심가들도 있었다 한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혈투에서 패한 후쿠오카 통치자 쇼니는 九州(구주)에서 세력을 잃게 되자 재기(再起)를 꿈꾸는데 쇼니가 재기할 꿈을 다진 곳은 대마도와 바다 건너 고려였다.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로부터 협공을 받은 고려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대규모 侵寇(침구)가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방군제가 무너진 고려정부로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고려는 왜구의 침입을 막부의 힘을 빌려 막아보려고 1367년 김일(金逸)을 무로마찌에 파견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지만 막부 자체가 통제할 능력을 잃어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1372년) 왜구가 동해안을 점령했다면 송도에서 군사를 보내 물리칠 능력이 부족하여 한동안 왜구의 점령지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3. 이옥과 김구용 가문과의 인연 적을 물리친 뒤 안렴사 김구용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공민왕은 한때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춘부의 장남이 관노(官奴)의 몸으로 대규모 왜구를 섬멸하고 강릉도를 지켰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관노의 신분에서 풀어주고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함과 더불어 일가친척 모두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옥에게는 사치(思恥), 사근(思謹), 사검(思儉), 사임(思任) 등 아들이 넷이었는데 그 중에 사검(士儉 1381~1446))은 셋째아들로 1405년(태종 5년) 무과에 급제, 공조참판, 울산부사, 경창부윤(慶昌府尹)등을 거쳐 1445년 자헌대부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이사검의 장녀가 직제학을 지낸 김맹헌(金孟獻)에게 출가하였는데 바로 김구용의 손자다. 즉 이옥과 김구용은 아들 대(이사검과 김명리)에서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런데 이사검의 외아들 이휘(李徽) : ?~1456)가 공조 참의로 있을 때 처남인 이개(李塏)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가산은 적몰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이사검의 묘소를 외손인 안동김씨 문온공파 직제학계 문중에서 500여년 오랜 세월에 걸쳐 외손봉사(시제)를 해 오다가 최근에 이사검의 문중에서 후손들이 찾아 향사를 맡아오고 있다. 묘소를 찾게 된 계기는 이사검의 묘가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38호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절손된 묘소를 외손이 효를 다하기 위해 모셔왔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안동김씨 문중에 의하면 직제학 김맹헌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500여년을 봉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즉 김맹헌의 유지(遺志)는 바로 조부인 김구용과 처조부인 이옥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지방수령의 입장에서 임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관아마저도 위태로울 때 마침 옛 친구인 이옥이 관노로 와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의 용맹을 잘 알고 있는 김구용이 이옥에게 부탁했을 것이고, 이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적을 물리쳐 서로에게 깊은 우정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옥은 그 후 좌상시를 거쳐 강릉도절제사를 맡게 되는데 다른 지역과 달리 동해안 일대는 조선 초기까지도 왜구의 침공은 없었다. 양가(兩家)의 좋은 감정은 아들 대에서 결실을 맺어 이사검과 김명리가 사돈을 맺게 되는데 이사검의 아들이 불행을 겪고 절손될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김명리의 아들인 김맹헌이 유지를 내려 후손들이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결 론

역사(歷史)란 서실(事實)의 꾸준한 확인을 통한 과거사(過去事)의 복원(復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現在的) 의식(意識)과 철학(哲學)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과거를 생각하고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서 논의된 것은 대체로 역사를 “인류생활의 과거에 일어난 일들” 또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라는 두가지 경향으로 모색되어 왔다. 즉 前者가 과거 사실의 복원이나 재구성을 강조하는 「역사주의적 정의」라면 後者는 역사가 오늘날의 가치관과 역사적 과제 해결을 위해 구성된 가공(架空)의 과거라는 「현재주의적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이 두가지 경향을 종합해 사화과학으로서 역사학을 정립한 사람이 영국의 카아(E. H. Carr)였다. 그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여 랑케식 역사주의적 가치중립성(몰가치)을 비판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현재주의적 역사학도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다원주의 역사학이 대두되면서 큰 시련에 봉착하고 있다.

한편 東洋에서 역사를 보는 눈은 ‘歷史’라는 용어 그 자체에서 이미 나타난다. 즉 역(歷, 曆)은 하늘의 뜻이 있는 말이고 사(史)란 공평하다는 ‘가운데 中’에서 파생된 말로써 역사란 ‘하늘의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입각해 공정하게 기록한다’ 는 의미이다. 동양에서의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후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해 시간의 변화를 밝히고 그것이 시간이 지배하는 인간세계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피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천명을 인간이 어떻게 잘 지켜왔는가 하는 문제가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이유였고 천명은 바로 民心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인식은 대부분 승자(勝者)의 편에서 읽혀왔고, 기록된 문헌을 통해서만 해석되어 왔다. 다시 말해 고려의 역사는 고려의 패망과 더불어 대부분 묻히고, 조선 건국후 반세기가 흐른 뒤 새왕조의 지시에 의하여 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등이 正史로 인정받고 읽혀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고려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조선 왕조와 관료들의 史觀으로 본 뒤에 다시 우리 자신의 역사관으로 재해석해 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이도 최근 민중사관(民衆史觀) 또는 사회과학적인 역사관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고려의 역사도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있다. 2005년도 후반에 방영되었던 MBC 역사드라마 ‘신돈’도 그 맥락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고려사 신돈열전을 보면 역적이지만 오늘날 민중사관에서 볼 때는 뛰어난 개혁정치가였다.

고려의 역사는 여러 가지로 조선의 역사와 비교된다. 관용과 타협은 고사하고 글자 한자에 利害가 얽혀 代를 이어 논쟁하고 세도정치와 매관매직으로 귀족 이상의 권력을 전횡하던 조선의 양반귀족에 비해, 각기 다른 사병과 권력을 私的으로 소유해 겉으로 보면 적자생존의 법칙이 번득이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어디까지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세련된 정치력을 보였던 고려가 정치적, 도덕면에서 결코 뒤처졌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징기스칸의 몽고제국이 전세계를 정복할 당시 수많은 나라 중에서 30여년을 견딘 나라도 없었거니와 몽고의 무적 기마병이 상대국의 정규군보다 민중(삼별초)과 직접 조우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경우는 오직 고려밖에 없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처럼 고려라는 나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다원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점쳐지던 시기였다. 한편,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은 대부분 몇몇 문헌 등을 통해 기록된 사람들 중심이거나 아주 적은 기록이라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미화ㆍ확대된 사람들만 소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 삼국시대나 남북조시대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끊임없이 소개되어 왔고, 조선조 위대한 인물들은 유교사상에 입각해 충(忠), 효(孝), 예(禮), 의(義)의 범주에서 특히 忠 孝를 잘 지킨 인물들 중심으로 소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가운데는 후대 作家들에 의해 상당부분 미화되거나 확대되어 ‘영웅’으로 각인된 역사적 인물들도 많다. 14세기 말 강릉도절제사(江陵都節制使)를 지낸 李沃 장군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및 용재총화 등에 드라마틱한 기사 한토막이 반복해서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지금까지 잊혀진 인물로, 후대에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후손 또는 이 시대 작가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고 싶다


(註①) 용재총화(慵齊叢話) 조선 초기의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이 지은 잡록(雜錄). 모두 10권으로 분량은 많지 않으나 기록한 내용이 다양하므로 '총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에 이르기까지의 민속이나 문학에 대한 논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역사·지리·종교·학문·음악·서화(書畵)·문물제도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각 분야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유명 인사에서 하층민까지 가리지 않고 서술 대상으로 삼으면서 음담패설이라 할 만한 것까지 포함시켰다. 각 권은 편차(編差) 없이 서술되어 있으며, 권별의 구분도 내용과는 관계 없다. 풍속이나 설화 등을 수록하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1525년(중종 20) 경주에서 간행되어 3권 3책의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 大東野乘〉에 수록되었다 (註②) <고려사절요>1371년 공민왕 20년 辛亥 윤三月癸酉日 龍循野에서 활을 잘 쏘아 왕으로부터 鞍馬를 하사받음 (註③) 공민왕의 최후 신돈을 잃고 공민왕은 정치에는 소홀히 하면서 자제위에 뽑혀 들어온 미소년들을 왕비들과 같이 자게 하여 아들을 낳으면 자기의 후계자가 될 왕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시 최만생이라는 자가 왕이 변소에서 용변을 보는 중 이렇게 고했다. ‘익비께서 임신하여 5개월이 된 듯하옵니다.’ 하자 왕이 물었다. ‘익비의 상대가 누구였더냐?’ ‘홍윤이라 하옵니다.’ ‘내일 창릉에 가게 되어 있으니 갈 때 홍윤을 데리고 가서 술을 잔뜩 먹이고 죽여서 이 비밀이 새나가지 않게 해야 하겠다. 이 계획을 알았으니 너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였다. 왕의 생각을 알게 된 최만생은 겁이 나서 미동들인 홍윤, 권진, 노선 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로 하여 자기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당하기 전에 먼저 왕을 죽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 날(1374년 9월 22일) 밤 3시에 술에 크게 취하여 잠자리에 든 왕을 최만생이 먼저 칼로 찌르고 나머지들은 몽둥이로 때려서 죽였다(고려사를 바탕으로 후세 史家들이 재구성한 내용) 2016년 3월 16일 (수) 15:31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