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정벌 편집에 대해서 편집

  • 그러나 이 '사불가론'은 이성계 당시의 기록인 이성계의 묘지문(무덤안에 넣는 비석.)과 비석에는 전혀 없는 내용으로 후대의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의 후대 조선 측의 기록들에서만 나와서 정말로 이 시점에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지 의문이 있다. 나중에 후대의 조선왕조측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정당화를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 우왕과 최영의 정적인 조선왕조측에서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조선왕조의 고려시대 관찬사서들을 보면 '요동정벌'이 논의될때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의 고려말의 고려측 인물들은 물론이고,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이지란 등의 친 이성계 세력도 반대하지 않은 것과 또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측이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소를 우왕에게 올렸을때 우왕이 이를 반박하는 교지를 내리면서 애초에 정벌이 논의 되었을때는 모두가 다 찬성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감히 명을 어기냐는 질책을 했을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사서들에서 당시 이성계 측과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전혀 반박하지 못한 점들을 들어 위의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이 때 최영이 조민수의 본대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의 본대를 격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최영이 조민수보다 더 나은 이성계의 본대를 상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설령 조민수에게 압도적인 병력으로 최영을 붙잡아둔 후 자신은 최영의 부하인 안소가 지키는 성문 쪽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경우 왜 '개성 전투' 이후 조민수의 영향력이 커져 그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시켰는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이성계의 본대를 최영이 격파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수의 본대가 안소의 방어선을 뚫고 최영의 배후를 쳐 이성계와 조민수의 앞뒤의 협공으로 이성계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정황이 추측된다.

이런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견해는 갖을 수 있으나 위키백과:중립적 시각위키백과:중립적 시각#공정한 표현에 어긋나며 이런 식의 편집 서술은 지양되는 바입니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편향된 문장을 중립적으로 바꾸기를 참고해 보세요.--Eternal and lif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10:38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