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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pei (토론) 2009년 6월 30일 (화) 04:49 (KST)답변

왕공가궤범 문서 편집

왕공가궤범 문서는 위키백과사전에 어울리지 않는 글입니다. 백:오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Distroi님이 생성한 문서는 위키문헌에 올리시는 쪽이 보다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Gwpei (토론) 2009년 6월 30일 (화) 04:51 (KST)답변

조언 감사합니다. (__)>--Distroi (토론) 2009년 9월 7일 (월) 05:01 (KST)답변

조선 왕 편집

로 좋은 편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대한제국에서서 불리던게 뭐가 중요한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7일 (월) 03:21 (KST)답변

추가로 어째서 영왕(英王)이라는 작위가 의민태자의 묘호가 되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7일 (월) 04:41 (KST)답변

대한제국에서 불리던게 뭐가 중요하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네요. 대한제국이 없던 나라인가요? 엄연히 역사에 존재하는 나라고, 그 나라에서 바뀐 시호를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의민태자의 묘호가 영왕으로 되어있는 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그렇게 한 거라서 저는 할 말이 없네요;; 황태자 책봉때 영왕 칭호는 폐지된 것인데 왜 묘호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씌여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쓰고는 있습니다만, 왜 묘호가 영왕으로 되어있는지는 제가 아니라 대동종약원에 물어보셔야 할 것 같네요;;--Distroi (토론) 2009년 9월 7일 (월) 04:54 (KST)답변

뭐 쓰신 분이 그렇게 썼으니 당연히 쓰신 분께 물어보는게 제일 좋죠. 뭐 일단 의민태자의 시호는 살려두었지만 영왕을 묘호로 썼다는 내용은 지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7일 (월) 05:12 (KST)답변

조선 왕 한번 더 편집

시호를 쓰는 건 좋은데 왜 띄어쓰기로 표기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시호를 모두 붙여 쓰지 따로따로 쓰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10일 (목) 06:11 (KST)답변

아...버튼을 잘못 눌러서 세번째 다시 쓰고 있습니다...ㅠㅠ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호를 띄어쓰는 건 당연한 구분법입니다. 시호라는 게 통으로 올려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Distroi (토론) 2009년 9월 10일 (목) 10:40 (KST)답변

그렇다한들 시호는 붙여쓰는 게 제대로 된 거 아닌가요? 물론 주어진 시호와 존호는 다릅니다만 그건 별개의 문단에서 다루면 될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도 묘호, 시호, 존호는 무슨 뜻인지는 잘 알기에 그렇게 상세하게 뜻을 풀이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10일 (목) 11:03 (KST)답변
그런데 종묘 대례 등이나 대동종약원 같은 데에선 모두 붙여쓰기로 시호를 표기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말씀드렸듯 긴 시호는 모두 붙여서 개요 문단에 쓰고 시호와 존호 등은 나누어서 별개의 문단에다 쓰면 될 것 같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9월 10일 (목) 11:10 (KST)답변

아...제가 안해도 될 설명만 길게 했군요;; 크흑 T.T 말씀해주신 대로 별개의 문단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__)> --Distroi (토론) 2009년 9월 10일 (목) 12:02 (KST)답변

제가 알기로는 睿敬慈粹는 휘호이고 孝懿는 시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비에게 묘호는 따로 올려지지 않구요.--kbr0706 (토론) 2009년 10월 31일 (일) 00:25 (KST)답변

명나라 시호 편집

제가 알기로는 명나라에서 역대 조선 왕들에게 내린 시호를 폐지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종의 경우 종묘 신위에도 그대로 榮靖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으로 표기 되어있구요. 구체적인 출처가 궁금하네요. --kbr0706 (토론) 2009년 10월 31일 (일) 22:11 (KST)답변

근 1년만에 답변 올립니다.

우선 신위(위판)에서의 명 시호 삭제 문제는, 고종실록을 찾아보니 관련 기록이 있었습니다.

(날짜는 실록 표시기준)1897년 10월 13일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사직단의 위판은 이미 그 전인 10월 8일에 고쳐 쓰도록 명령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구단을 짓고 신위를 만드는 김에 사직단 또한 격상시켰던 것 같은데, 종묘의 신위는 이때 거행한 것은 아니고 제국 선포 이후, 태조와 4대조 추존 때인 듯 합니다.

광무 2년인 1899년 12월 3일에 태조와 4대조를 추존하도록 명령하고, 이어서 4일 기사에 보면 추존하고 배천할 때의 신위판을 만드는 곳은 인정전으로 할 것을 명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13일 기사에 보면 심순택의 상소가 있는데,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13일(양력) 3번째기사 심순택이 신주에 고쳐 쓰는 것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612013_003

(전략)대체로 종묘(宗廟)의 규례에서 제주(題主)가 특히 중대하여 각 실(室)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데, 시호(諡號)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존호(尊號)를 쓴 실도 있고, 또 존호를 먼저 쓰고 다음에 시호를 쓴 실도 있는 만큼 한 번 이정(釐正)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항간의 평범한 백성들도 조상을 받드는 데서 미진한 예법이 있으면 널리 상고하여 반드시 이정하는데, 하물며 천자의 나라인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제 큰 의식을 가지고 신주를 고쳐쓰는 때를 당하여 더구나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숙묘(肅廟) 계해년(1683)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문을 올려 종묘의 규례를 논하면서 위판(位版)과 축문(祝文)이 서로 어긋나는 것과 잘못된 곳을 바로잡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호(廟號) 위의 두 글자의 시호는 응당 없애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지만, 일의 체모가 더없이 공경스러우므로 감히 단정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大臣)들과 의논해서 가부(可否)를 정한 다음 결재를 받아서 처리하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전략)

종묘의 신위판에 쓰여진 시호들의 순서가 조금씩 달랐다는 걸 알 수 있고, 심순택은 기왕 신위를 고쳐쓰는 거 태조와 4대조만 고쳐쓰지 말고 모든 신위와 축문 서식을 함께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묘호 위의 두 글자겠지요. 태조의 시호가 강헌 지인계운...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명나라의 사여 시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은 심순택의 상소에는 그럴 겨를이 없다고 비답하지만, 그 다음 기사를 보면 바로 대신들을 모아 그 문제를 의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13일(양력) 4번째기사 의정과 장례원 당상을 소견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612013_004

(전략)상이 이르기를, “방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이 올린 상소를 보니, ‘하나의 종묘(宗廟) 안에서 각 실(室)의 규례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숙묘(肅廟) 계해년(1683)의 전례를 끌어다 묘호(廟號) 위의 시호(諡號)를 없애고 바로잡자고 말하였다. 이 대신은 본래 노숙하고 덕망이 있는 원로로서 몸은 비록 지방에 있지만 이런 전례(典禮)를 당하여 규례를 상고해서 청하였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그래서 경들을 소견하여 이렇게 묻는 것인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후략)

숙묘의 전례라는 것은 아마 정종을 공정왕 대신 정종으로 정식 묘호를 올려 칭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명나라 시호를 제거할 것을 의논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대신들도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명령이 내려집니다.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13일(양력) 5번째기사 태묘 각 실 신주의 묘호 위의 여섯 글자를 고쳐 쓸 것을 명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612013_005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원로 대신이 숙종(肅宗) 계해년(1683)에 이미 시행한 규례를 끌어다 청하였다. 하나의 종묘(宗廟) 안에서 예와 제도가 같지 않은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인 만큼 전례(典禮)를 이제 진행하게 된 형편에서 응당 이정(釐正)해야 할 것이다. 비록 지방에 있는 대신(大臣)들이나 어진 선비들에게는 물어볼 겨를이 없었지만, 의정(議政)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을 인견(引見)하여 물어보니 역시 다른 의견이 없었다. 태묘(太廟) 각 실(室)에 있는 위판(位版)의 묘호(廟號) 위의 여섯 글자는 예관(禮官)에게 삼가 상고해서 고쳐쓰게 하라.” 하였다.

여기서 묘호 위의 여섯 글자라는 표현이 좀 알쏭달쏭합니다. 심순택의 상소에는 묘호 위 두 글자로 되어있고 명나라에서 준 시호도 두글자인데, 그 외에도 네 글자를 더 삭제하라는 말이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록 원문에도 六자로 되어 있고... 이 부분은 좀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때 종묘의 신위를 모두 고쳐 썼다는 것입니다. +++여섯 글자에 대한 애기도 찾았습니다. 더 찾아봤는데, 시호 외의 네 글자란 건 유명 사시有明 賜諡를 얘기하는 거였네요. 태조의 신위를 처음 쓸 때 유명 사시 강헌 황고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有明賜諡康獻皇考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고 썼다는 기록이 있네요. 태조의 시호가 그랬으니 아마 대대로 신위에 그렇게 썼을테고... 저 네 글자가 붙는 걸 깜빡했네요...여섯 글자는 유명 사시+명에서 준 시호 두글자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13일(양력) 6번째기사 태묘 각 실 신주의 묘호 위의 여섯 글자를 고쳐 쓰도록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612013_006

장례원(掌禮院)에서 아뢰기를, “태묘(太廟) 각 실에 있는 위판(位版)의 묘호(廟號) 위의 여섯 글자를 삼가 상고해서 고쳐쓰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태묘 제1실·제2실·제3실·제4실·제5실·제6실·제7실과 영녕전(永寧殿) 제5실·제6실·제7실·제8실·제9실·제10실·제11실·제12실의 위판은 삼가 고쳐써야 하는 만큼 즉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되, 종묘 제1실은 같은 날 추존(追尊)하여 올리는 책보(冊寶)를 올린 후 고쳐 쓸 때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태묘의 제 1실부터 7실까지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가, 영녕전의 제 5실부터 12실까지는 정종 문종 단종 덕종(성종父) 예종 인종 명종 원종(인조父)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원종의 경우 숭정제가 내린 공량恭良을 삭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조부터는 신위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인조 때부터 중국에서 내린 사여 시호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다음해 (경자년 1900년) 3월에 함흥과 영흥 본궁의 위판 또한 고치게 됩니다.

고종 40권, 37년(1900 경자 / 대한 광무(光武) 4년) 3월 13일(양력) 3번째기사 탁지부 협판 주석면이 영흥과 함흥 두 본궁의 위판을 고칠 것을 청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703013_003

(전략)작년 겨울에 이미 옛 신주의 이름을 고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종묘(宗廟)와 원묘(原廟)를 다르게 해서는 안 되는데, 영흥(永興)과 함흥(咸興) 두 본궁의 위판(位版)을 모두 즉시 고치지 않았으니 어찌 한 때에 겨를이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이번에 준원전(濬源殿)의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하는 날에 위판의 이름을 고치는 절차도 아울러 거행하는 것이 예전(禮典)에 맞을 듯 합니다. 일이 중대하므로 삼가 바라건대, 대신(大臣)과 장례원 예관(掌禮院禮官)에게 널리 물어서 잘 헤아려 결정하소서.(후략)



고종 40권, 37년(1900 경자 / 대한 광무(光武) 4년) 3월 13일(양력) 4번째기사 함흥과 영흥의 두 본궁에 봉안한 태조 고황제 등의 위판을 개제할 것을 명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703013_004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신의 고황후(神懿高皇后), 신덕 고황후(神德高皇后)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으나 추존(追尊)한 이후에 아직까지 개제(改題)하지 못하였으니 인정과 예의상 매우 송구스럽다. 대신(大臣)과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이 봉심(奉審)할 것이니 개제의 의식 절차를 장례원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고 제주관(題主官)은 장례원 경(掌禮院卿)으로 임명하라.” 하였다.

본궁과 북도 각릉을 봉심하고 준원전의 어진을 이봉할 때 위판 또한 고치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 40권, 37년(1900 경자 / 대한 광무(光武) 4년) 4월 20일(양력) 3번째기사 영정을 모신 후 윤용선 등에게 함흥과 영흥의 사정에 대해 논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3704020_003

(전략) 상이 이르기를, “여러 능(陵) 위는 모두 태평하고, 두 본궁(本宮)도 안녕하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각릉(各陵)과 두 본궁에 나아가 봉심하니 모두 안녕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을 고쳐 쓴 다음에 작헌례도 잘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초(莎草)가 마른 곳이 좀 있었고 비각(碑閣)에 비가 새며 앞에 늘인 휘장의 색깔이 변색하였으므로 전부 수리하도록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후략)

종묘의 신위는 물론 본궁의 신위 또한 확실히 고쳐 썼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일을 논의한 기록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고전종합 DB의 면암집>면암선생문집 제 5권>소疏 의 수옥헌(漱玉軒)에서 아뢰는 차자(箚子) 입니다. 수옥헌(漱玉軒)에서 아뢰는 차자(箚子) 갑진년(1904, 광무 8) 12월 2일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e002&gunchaId=av005&muncheId=01&finId=007&NodeId=&setid=1501267&Pos=0&TotalCount=3&searchUrl=ok

(전략) 신이 살펴보건대,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로 국가의 전례가 잘못된 것이 다섯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종묘 위판(位版)에 명(明) 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깎아 버린 것이 첫째요, 4세(四世)를 추존할 때에 진종(眞宗)ㆍ헌종(憲宗)ㆍ철종(哲宗)을 빼 버리고 거행하지 아니한 것이 둘째요, 경효전(景孝殿 명성황후의 혼전(魂殿)) 및 홍릉(洪陵 명성황후의 능)의 궤전(饋奠)을 그만두지 않음이 셋째요,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 민씨(閔氏))의 초상에 신민들의 복을 또한 기년(期年)으로 한 것이 넷째요, 문묘(文廟)의 축식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중용(中庸)》에 ‘그 자리에 나아가 선왕의 예를 거행하고 선왕의 음악을 연주하며 선왕이 존숭하던 바를 공경하고 선왕이 친애하던 바를 친애한다.’ 하였으니 폐하께서 임어한 자리가 어찌 열성조가 임어한 자리가 아니며, 폐하께서 거행하시는 예가 어찌 열성조가 거행하시던 예가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열성조들이 임어한 자리에 임어하였으며 열성조들이 거행하던 예를 거행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열성과 선왕들의 친애하던 바를 친애해야 할 것입니다. 명 나라 천자가 어찌 열성조들이 존숭하던 바가 아니고 진종대왕이 어찌 정조대왕께서 존숭하던 바가 아니며, 헌종대왕과 철종대왕이 또한 어찌 폐하께서 존숭하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로 말한다면,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삭제하고 진종ㆍ헌종ㆍ철종을 추존하지 아니한 것은 모두 논의되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우선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로써 말한다면, 논하는 사람들이 ‘이미 태조(太祖)를 추존하여 고황제(高皇帝)로 한다면,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가 그대로 있는 것이 어찌 불편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할 것이나, 만일 이 말처럼 반드시 부득이하여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 네 글자를 쓸 수 없다면, 다만 ‘태조 강헌존호휘호 고황제(太祖康獻尊號徽號高皇帝)’라고 하면 무엇이 안 되어서 반드시 모두 삭제해야만 합니까? 더구나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 이하부터는 처음부터 불편한 단서가 없는데도 한결같은 예로 삭제한 것은 또한 무슨 일입니까? 또한 만약 주(周) 나라 왕실에서 위로 선공(先公)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천자의 예를 쓴 전례로 들어서 ‘우리 선왕들도 이제는 명 나라 천자와 동등하게 높으니, 마땅히 그들이 내린 시호를 다시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않습니다. 주 나라가 조감(組紺) 이상을, 비록 천자의 제례(祭禮)로 향사하였으나, 그가 은 나라의 신하임에 틀림이 없으며, 우리나라 목조(穆祖 태조(太祖)의 고조) 이상의 선공들도 모두 일찍이 신라나 고려에서 벼슬하였는데, 태조(太祖)께서 천명을 받은 이유로 선공들이 신라나 고려에서 받은 직책을 삭제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만일 ‘이제 자주(自主)를 하니,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다시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 이것도 옳지 못합니다. 탕(湯) 임금은 하(夏) 나라 신하였던 것을 숨기지 않았고, 무왕(武王)은 은(殷) 나라 신하였던 것을 숨기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만이 어찌 유독 명 나라 신하였던 것을 숨겨야 합니까? 숭정(崇禎) 이후부터 천하에서 우리나라를 의(義)롭게 여기는 것은, 존주 대의(尊周大義)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보단(大報壇)과 만동묘(萬東廟)가 천하 만세에 빛이 나고 드러남이 돌아보건대 어떻습니까? 그러한데 깊이 숨기려고 하는 것이 어찌 이른바 선왕의 예를 거행하고 선왕이 공경하던 바를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크게 예를 상실한 첫째입니다. (후략)


살펴보면 상소를 올리기 전에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가 전부 삭제되었고, 정종의 공정왕 시호도 떼었다는 표현으로 그것이 추존된 태조와 4대조 뿐만이 아닌 시호를 사여받은 모든 신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P.S: 말씀하셨다시피 종묘의 안내도에는 아직도 명나라 사여 시호가 버젓이 적혀 있습니다. 이후 진종 헌종 철종을 추존할 때는 물론이고 위판을 고쳐쓰는 것에 대한 논의는 아예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고종 때 고쳐진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태조의 신위에 강헌이 없는 걸 보기도 했는데...이미 폐지되어 지워진 시호를 왜 아직도 안내도에 표기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년 가까이 골치를 썩히던 의문을 풀었습니다만, 답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Distroi (토론) 2010년 8월 5일 (목) 16:39 (KST)답변

본문에도 추가했지만 묘호 위 여섯 글자라는 숫자에 대해서 관련 기록을 찾아 여기에 따로 덧붙여 둡니다. +++시호 외의 네 글자란 건 유명 사시有明 賜諡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태종 실록에 보니 태조의 신위를 처음 쓸 때 유명 사시 강헌 황고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有明賜諡康獻皇考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고 썼다는 기록이 있네요. 대대로 신위에 그렇게 썼던걸 깜빡했습니다... 여섯 글자라는 건 유명 사시+명에서 준 시호 두글자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Distroi (토론) 2010년 8월 6일 (금) 19:07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