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진편집

위 문서를 생성해 주셨는데, 청나라의 황족 계급 등에 무지했던 터라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해당 문서에 있어서 아래의 사항이 필요하여 알려드립니다.

  • 출처 밝히기 : 해당 문서에는 아무런 출처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백:출처 를 참고하여 적절한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우선 해당 문서에는 출처 필요 틀을 달았습니다. 출처를 제시하신 후에는 해당 틀을 제거해 주세요.
  • 분류 달기 : 위키백과의 모든 문서에는 분류가 있어야 합니다. 백:분류 를 참고하신 후 적절한 분류를 달아주세요.
  • 일부 내용에 관해 : "주의 사항" 처럼 특정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에게 "주장"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은 제거하고, 해당 내용을 백과사전에 어울리게 객관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당 문서의 의순공주 부분에서, 편집 창에 "자꾸만 첩이라는 것들은..." 라고 하셨는데, 이는 다른 사용자를 비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감상으로 일반 문서의 편집창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판단될 뿐 아니라 문서의 편집에 크게 필요한 내용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어 제거하였습니다.

특히 적절한 출처와 분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 앞으로는 꼭 제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심자 (토론) 2012년 6월 21일 (목) 07:09 (KST)[]

 답변 아주 마이너한 내용인데다 한국 시간도 이른 지라 벌써 확인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본 골격만 잡아둔 채 잠시 딴 짓으로 머리를 식히던 상태였습니다. 아예 청 황족의 작위를 모두 집어넣어버릴까 구상 중이기도 하고, 출처 삽입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 원문이 한국어가 아니어서요. "자꾸만 첩이라는 것들은..."은 확인하셨다시피 태그를 이용해 숨김글로 넣은 것일 뿐이지 공개할 마음도 없었고, 앞서 의순공주와 도르곤 문서를 수정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이었기 때문에 짜증이 좀 섞여 있었습니다.(중국 사료를 확인하다보면 열 받는 일이 많습니다.) 일시적인 변덕으로 현재 심정을 잠깐 넣었던 건데, 너무 빨리 발각되서. 잘못했습니다. 주의사항이란 가제도 자료수집 중에 집결된 짜증이 일시적으로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탓도 있으니 이번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영빈 김씨 문서에서의 상복 관련 내용편집

귀하께서 추가해주신 영빈 김씨 문서에서의 상복 관련 내용은,

  • 해당 인물의 생애 등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적다고 판단되었고,
  • 해당 내용을 당시 시대 사람들을 다룬 모든 문서에 사족으로 추가하는 것도 다소 어렵다고 판단되고,
  • 해당 내용처럼 특정 대상만에게 해당되지 않는 내용을 특정 인물 문서에 추가할 경우, 그 추가 가능 내용의 범위가 무제한적으로 늘어나 해당 인물에 관한 정보를 찾고자 하는 이에게 가독성을 떨어뜨리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 일부 위키백과의 형식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내용을 보다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장례 문서로 그대로 옮겨 재편집 하였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추신) 영빈 김씨의 가족관계에 대해 작성하신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어찌 하여 그렇게 상세한 가족 관계를 알아내셨는지.. 평소에 저도 왕실 인물에 관심이 많은 터라, 혹 앞으로도 온라인 공간에서나마 자주 뵈면서 여러 정보를 공유도 하고, 귀하께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심자 (토론) 2012년 12월 16일 (일) 00:14 (KST)[]
 답변영빈 김씨의 가계에 추가한 가족관계가 그녀의 활동시기(숙종~영조 초)에 발생한 정치 사화의 배경이었던데다가 조선 후기의 비빈의 간택 배경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의 시발점이기도 해서 압축이 불가능했습니다.(당론과 개인의 입장에 맞춰 각색된 실록과 개인저서, 야사보다 솔직한 가계도) 하지만 종가 출신이 아닌 현대인의 시점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듯도 보여,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삭제될 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당시의 가족 범위를 알리기 위해 참고로 상법을 더한 것이었습니다. 실은 저도 위키의 형식과 떨어진 듯 해 내용을 넣기까지 많이 고민했고, 넣고 나서도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정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런데 상복 문제는 장례의 범주가 아니라 상례의 영역이니 상례 페이지로 옮겨야 할 듯 보이는데...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Jianna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상례 페이지가 더 어울린다면(더 어울리는 문서가 있다면), 그 관련 문서로 내용을 옮겨주시면 됩니다. ^^ --소심자 (토론) 2012년 12월 16일 (일) 09:37 (KST)[]

영풍군부인 신씨에 관해편집

숭선군 문서에서 숭선군의 부인인 신씨의 작호가 영풍군부인이라는 출처(실록, 기타 신빙성 있는 자료)를 주석으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Abend (토론) 2013년 5월 12일 (일) 20:19 (KST)[]

 답변崇善君澂妻申氏爲永豐郡夫人。(번역: 숭선군 징의 처 신씨를 영풍군부인으로 삼는다.) - 《승정원일기》인조 26년 8월 19일 (신해) 원본102책/탈초본5책 (5/5)--Jianna

대빈묘편집

귀하께서 위 문서에 추가하신 내용 중, 주석 3번의 내용 "한 유명 재야사학자", "여러 신문에 인용되어 정설처럼..." 등의 내용이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듯 합니다. 우선은 해당 주석에 출처 필요 틀을 달았습니다.

"한 유명 재야사학자" 등의 서술은 다소 애매하고 가리키는 대상도 명확하지 않아 백과사전으로서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 대상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여러 신문에 이용되어 정설처럼 퍼지고 있다." 등의 내용도 그 출처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정확한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정설처럼 유포되고 있다는 것은 증명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소심자 (토론) 2013년 5월 17일 (금) 01:29 (KST)[]

 답변 이덕일 씨의 《조선왕 독살사건》을 비롯, 같은 주제의 다른 여러 서적에도 소현세자의 무덤이 봉원되지 않은 것이 인조의 미움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되어 있고, 이이화 씨의 《한국사이야기 13: 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습니다.
인조는 관에 재궁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나 서인에게 쓰는 널 구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 대신 묘자를 쓰게 했다.
— 《조선왕 독살사건》p.205
인조는 이 의문의 죽음에 한 점 의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혐의자들을 두둔했다. 무덤도 간소하게 꾸미라고 하였으며,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는 의식도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세손의 자리를 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묘지도 홍제동에 정하자는 건의를 묵살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孝陵) 뒤 언덕바지로 지정하였다. 묘의 이름도 원칙대로라면 '원'(園)이라 해야 하는데 '묘'(墓)자를 붙이라고 지시하였다.
— 《한국사이야기 13: 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p.35

인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에선 원을 쓴 사례가 전무했었고,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왕세자의 무덤이 봉원된 건 고종시대입니다. - 조선 왕릉 페이지 중 원의 정보에 봉원년도를 추가해두었습니다.

대체로 천자를 장사지낸 곳을 능(陵) 혹은 원(園)이라 하고 제후와 왕을 장사지낸 곳을 원이라 하니, 원은 천자나 제후가 모두 일컬을 수 있으나 능은 천자만이 가능하고 천자가 아니면 능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 제후 왕이 아니면 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한(漢)나라의 여태자(戾太子)334) 와 도왕(悼王)335) , 그리고 송(宋)나라의 복왕(濮王)336) 은 비록 위로 천자까지 되지는 못하였으나 제후 왕의 반열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묘를 원이라고 했던 것이니, 이는 그들의 분수로 볼 때 당연한 호칭으로 원래 높여 받들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능이라고 호칭하기 시작은 것은 신라와 고려 때부터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성조(聖朝)에서 창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당한 예(禮)로 비추어 볼 때는 논의가 안 될 수 없는 문제인데, 더구나 원이라는 칭호는 사실 아직까지 없었던 일로서 쉽게 창시할 문제가 아닐 듯싶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인조 12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4월 3일(을해)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열성조(列聖朝)의 세자(世子)나 세손(世孫)은 사체(事體)가 자별한데 의절(儀節)이 도리어 각궁(各宮)보다 하찮게 된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묘호(墓號)를 원(園)으로 높이고, (중략)
— 고종 7권, 7년(1870 경오 / 청 동치(同治) 9년) 12월 6일(정묘) 1번째기사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은 ‘열성조(列聖朝)의 세자나 세손은 정성스럽게 받드는 의절(儀節)은 대개 일찍이 당(唐) 나라 역사에 보이는 태자(太子)들에 대하여 원에 제사지내는 예(禮)에서 절충한 것인데, 묘(墓)라 하고 원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다만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묘호를 원으로 승격시키고 묘관(墓官)의 이름을 고쳐 부르는 것은 참으로 예법의 뜻에 합당합니다.
— 고종 7권, 7년(1870 경오 / 청 동치(同治) 9년) 12월 9일(경오) 3번째기사

세조의 세자, 명종의 세자, 영조의 두 세자와 세손, 정조의 세자, 순조의 세자 모두 무덤이 묘였다가 고종 7년에 바꾼 기록이 실록에 버젓이 있는데, 이덕일 씨가 이를 확인하지 않았는지 고종시대를 기준으로 확립된 '세자의 무덤은 원이다.'는 사전적 정의를 조선시대 전체에 포괄하여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무덤이 원이 아닌 묘인 것은 부왕의 미움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독살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엄연한 오류입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퍼진 상태더군요. 여기 위키에도 소현세자 페이지에 '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으며,'라고 되어 있는 걸 수정해두었습니다.

신문기사의 경우엔, 특히나 이덕일 씨의 저서 내용을 검토도 없이 인용(=카피)를 반복해온 오마이뉴스와 중앙선데이에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 중 한가지를 출처로 제시합니다.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081114180004692

인조가 잘라 말했다.

"원으로 할까요? 묘로 할까요?"
이조(吏曹)가 의문(儀文)을 제기했다. 왕실 묘제는 능, 원, 묘로 구분된다. 등극했거나 추존된 왕과 왕후는 릉(陵), 세자와 세자빈은 원(園), 강등된 왕과 그밖에 왕실 사친은 묘(墓)로 칭했다.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가 여기에 해당된다.
"묘로 하라."
예정된 수순처럼 인조의 의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를 본문에 밝히지 않은 건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는 있는데 이걸 사전인 위키에까지 학자의 실명과 저서명을 언급하며 정정하는 행위는 차마...(토론 페이지야 많이들 안 보니까 그냥 공개합니다만.) 그래도 님께서 하시겠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 --사용자:Ji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