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인권협의회 편집

병천인권협의회는 1893년에 설립된 병천 최초의 인권기구 이다

병천인권협의회가 설립되었을 때의 상황 편집

점차 분쟁이 심해지고 국권이 약해지면서 새로운 권력들이 각 지방들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병천은 모드니에(旄頭妳殪 , 병천임시기구)의 관리를 받고있었는데, 정기례(程期鑢)가 들어오면서 힘이 약해져, 결국 해체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상황 편집

정기례(程期鑢)는 병천의 운영체계를 바꾸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반발 속에서도 자신들의 길을 꿋꿋히 걸어왔다. 한편 모드니에(旄頭妳殪)는 이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 1893년 병천인권협의회를 설립하여 병천에 있는 부패한 모든 권력들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앉게 된다.

영향 편집

병천인권협의회는 1901년 9월 30일, 상하이, 사우디를 다니며 한국의 현황을 알리고 많은 도움들을 요청하는 등의 활동을 했짐나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그들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천인권협의회는 다른 나라와 교류하고 협상하며 미래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이때 교류를 하면서 주었던 선물이 순대이고 순대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1904년 4월 28일, 한국인권협의회는 한국 최초 지리혁주의원(支離煂奏議苑)을 설립해 병천의 발전을 위해 힘 썼으며 병천혁신기구(甁川革新器具) 설치하여 한국의 정치체계를 뒤에서 바꿔왔다.

병천인권협의회간의 분쟁 편집

전보다 높아진 자신의 권력의 빠지게 된 병천인권협의회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 높이고 자 193년 5월 12일에 일어난 병천분쟁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후 병천에는 지역간의 분쟁이 심해졌으며 결국 다시 59년만에 해체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병천분쟁사건 이후의 병천 편집

병천사람들은 병천에 있던 권력들을 몰아내고, 병천의 전통, 멋을 살려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힘든 상황속에서 병천은 서로 도우며 살아왔고, 지금까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File:사용자 데니엘 양.pdf|thumb|병천인권엽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