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역사

한국인 최초 하버드 역사학 박사 조직량 편집

조직량((1927~1966)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1960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본명 조직호(曺稷浩)이고 영문명은 Ching Young Choe 이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유엔군 통역을 하다가 도미하여 8년 만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대원군 시대 개혁정치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버드 전체로는 1956년 경제학의 최기일 박사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최근에 발굴됐다.

조직량 박사의 부인이 스위스 출신으로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런던대학교의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er) 박사이다. 도이힐러(1935~) 박사는 1992년 <한국의 유교화 과정>, 2015년 <조상의 눈 아래에서>등 4권의 우리나라 역사서를 저술한 조선사의 대가로, 우리나라 역사를 씨족사회의 역사라고 갈파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조직량 박사의 본가 영천 귀애고택 편집

도이힐러 박사가 한국에 머물 때 한국의 전통과 친척 교감을 이룬 시댁, 즉 조직량 박사의 본가는 경북 영천 화남면에 있는 귀애고택이다. 문화재 귀애정과 연지(연못)가 일품인 조선후기 양반가옥으로, 1831년 과거 급제하여 영남인물로는 드물게 당상관 공조참의에 오른 귀애 조극승의 고택이다. 학문 천석, 재물 천석, 자식 천석이라 불렀던 가문이다. 조직량 박사는 귀애 조극승의 현손이다.

조 박사는 이곳에서 태어나 일본 야마구치고보를 마치고 중앙대학교에 입학, 6.25 때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2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덴버대학을 거쳐 33세에 하버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독일로 건너가 본 대학 등지에서 수년간 한국사를 강의하다가 1966년 39세 나이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병(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내 도이힐러 박사는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개항기 조선 외교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학문적 동기와 시댁 방문을 위해 혼자 한국으로 들어온다. 남편 조 박사의 뜻을 이어받아 규장각과 국내외 대학교에서 50년간 조선사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친족, 문중, 신분, 유교화 과정 등 조선사회사 연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다.

고택에는 도이힐러 박사가 시댁친척과 찍은 사진, 영문 저서 등이 있고 한국 이름이 ‘두정나’라고 한다. 중국 시성 두보처럼 한문에 박식하다고 아니면 ‘도이’와 어감이 비슷해서 '두'씨를 성씨로 택했는지 알 수 없다. 두정나의 ‘나’는 마르티나의 ‘나’와 같은 음이다. 도이힐러 박사가 고택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곳은 250년 전에 지어진 조선양반가옥의 부엌이다. 부엌은 250여 년 전 영조 때 안채와 함께 지어졌고 옛 모습 그대로이다. 1970년에는 조 박사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영천의 문중 선산에 묻혔다.

조직량 박사의 유작 <대원군의 개혁정치> 편집

조직량 박사의 사후 6년이 지난 1972년에,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센터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The Rule of the Taewŏ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이란 이름으로 유작을 출간한다.

조 박사의 유작에는 동아시아 연구센터가 쓴 서문과 감사 말씀, 목차, 본문, 마지막으로 도이힐러 박사가 쓴 에필로그가 있다. 본문은 총 1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60년 이전의 조선왕조 사회·경제적 환경에 대해 서술한 1장에서 시작하여 흥선대원군의 몰락을 다룬 13장까지 총 분량은 263쪽이다.

조 박사는 죽기 1년 전 1965년 9월에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책 출간에 대한 감사의 글을 썼는데 <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을 저술한 동연배의 한국사 대가,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의 친분이 언급돼 있고 이 때 이미 책 발간 준비를 마친 것 같다. 하버드 동아시아 연구센터에서는 유작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연구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고 유망한 젊은 학자에 대한 기념비”라고 했다.

그리고 감사의 말에는 동아시아 연구센터 편집장의 다양한 편집 단계 지원과 세심한 관심, 도이힐러 박사의 헌신적 도움에 감사한다고 했으니 하버드에서 배운 이론 적용하여 지극히 서구적인 방법론과 분석기법으로 과정을 탐구하고 결론을 도출한 것 같다.

유작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면 한국인이 하버드에서 한국역사에 대해 쓴 역사학 방법론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많은 후학들이 따라할 수 있을 터인데 번역서가 나오지 않아 많이 아쉽다. 유작의 분량 260여 페이지 중에서 주 해설과 참고 논저가 90페이지이다. 서구 역사학 방법론에서 볼 수 있는 방대한 문헌 인용과 서술 주장에 대한 철저한 주 해설이 부록으로 들어가 있다.

아울러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관련 모든 문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및 영어권 나라의 서적까지 참고 문헌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구한말 조선 역사에 관한 수장고가 어떠한지 조 박사의 유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도이힐러 박사의 유작 에필로그 편집

조 박사의 유작 맨 뒤에는 도이힐러 박사가 쓴 에필로그(발문跋文)가 있다. 에필로그는 출간 1년 전인 1971년에 썼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한국사의 미개척 분야는 우리에게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발전에 대한 유익한 비교를 도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더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연구를 자극하면 그 목적이 달성됩니다. 1971년 1월. 취리히에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남편 조 박사가 별세하고 그의 유작을 발간할 때 남편의 학문적 성과를 회고하고 미국 내 한국사 연구의 출발을 알리는 글이다. 에필로그는 지극히 서구적인 기법으로 대원군 시대를 분석하고 역사적 관점을 서술하였기에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조 박사는 부모님 기억에 이 책을 바친다고 했으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어버이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우리나라 대학교 도서관 소장 자료를 검색하면 조 박사의 유작을 어느 한 곳에서도 소장하고 있지 않다.

하버드 한국학파 1세대 인물들 편집

조직량 박사와 동시대에 하버드에서 한국학을 전공, 연구한 인물들을 한국학 1세대라 부르는데 다음 네 사람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하버드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내 하버드 한국학파의 선구자적인 인물들이다.

1.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1959년 학위, <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

2. 조직량(1927~1966), 1960년 학위, <대원군의 개혁정치>

3.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 1967년 학위, <조상의 눈 아래에서>

4. 제임스 팔레(1934~2006), 1968년 학위,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위 네 사람 가운데 한국인은 조직량 박사뿐이다. 조직량 박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서구 한국학의 시조, 비조라 칭송받으며 국내에서 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조직량 박사는 일찍 요절하였고 사후에 그의 유작이 출간되어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유작마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동시대에 하버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최초 인물인데도 그러하다. 오늘날 하버드와 우리나라 대학교 사이에 학문 교류가 매우 잦은데도 오랫동안 잊힌 인물이 되었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안다는 미국의 친한파 한국학자, 마크 피더슨 교수는 1987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유타주 브리검 영 대학교(Brigham Young Uni. BYU) 명예 교수이다. 학위 논문은 "조선중기 입양제와 상속제"이며 저술로 <유교사회의 창출>이 있다.

조직량 박사의 연구 현양 편집

조직량 박사가 요절하지 않고 한국학을 더 많이 연구했더라면 하버드 동아시아 역사학파 중심 인물이 되었을 터인데 많이 안타깝다. 학문적 성취는 널리 알려져야 빛이 나니, 어려웠던 시기에 조국의 미래를 깊이 침잠하고 학문에의 열정으로 매진한 젊은 사학자의 연구가 현양되어야 한다. 빠른 시기에 그의 유작이 한국어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33세에 하버드 박사가 되었건만 하늘이 그를 거두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1954년에 하버드에 입학하여 1960년에 학위를 받고 1966년에 요절했으며 1972년에 유작이 출간됐다. 6년 터울의 삶이다.

6.25 전란 속에서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가 각고의 노력을 하여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 역사학 박사가 된 조직량 박사의 학문적 성취를 발굴하고, 요절한 남편 조 박사의 뜻을 이어받아 50년간 조선사를 연구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던져준 그의 서양인 아내 도이힐러 박사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배경이다.

조직량 박사 생애 편집

-1927년 12월 27일 경북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귀애고택에서 출생

- 4세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야마구치고보에 유학

-1946년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고 경주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침

-1948년 서울 중앙대학교에 입학 (영문학과로 추정)

-6.25전쟁 때 유엔군 통역관으로 복무

-1952년 1월 도미하여 미국 덴버 대학교에 입학

-1954년 여름에 국제관계학 학사 학위를 받음

-1954년 가을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 하버드 옌칭 연구소의 장학금으로 중국역사, 일본역사, 러시아 연구, 경제학 및 인류학 등 광범위하게 공부함

-1956년 6월 하버드 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음

-1960년 6월 하버드 대학교에서 대원군의 개혁정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음

-1956년부터 1958년까지 하버드에서 한국어를 가르침.

-1960-61년 미국 학술 단체 협의회를 위해 한국사 강의 계획서를 편찬함

-1962년 하버드 동아시아연구센터 연구원 역임

-1962년 10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에서 펠로우십을 받고 독일 본으로 건너가 한국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고 본 대학교에서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침.

-1963년 11월 논문 <김육(1580-1658)과 대동법 개혁>을 아시아학 저널(제23권 제1호; 1963년 11월)에 발표함

-1965년 가을 독일 마르부르크/란(Marburg/Lahn)의 부름을 받아 국립도서관(Staatsbibliothek)의 한국어 분과인 Preussischer Kulturbesitz를 담당

-1966년 7월 8일 수개월간 투병 끝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

-1972년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센터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영문으로 출간.

저서: The Rule of the Taewŏ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 (1972,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센터)


(본 자료는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센터에서 쓴 유작 서문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