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영웅 최윤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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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과 이명》

최윤구(崔允龜)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동경) 사람이다.

1885-8-23~1940-2-15 (제적1942-09-10)

본관은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후손 경주(慶州) 최씨 이며 사성공파(司成公派) -예 이다.

최봉수(崔奉壽).김응자(金應自)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28대 손 호적명은 최현구(崔鉉九)이며 호는蒼岡 항쟁명:최윤구(崔允九.崔允求.).최운구(崔雲龜).최윤갑(崔允甲).최동경(崔東京.崔世雄).최윤규(崔允奎.崔允珪)최구규.崔久珪.)등이 있음)

향리에서 동경서당(東京書堂)에서 공부하여 훈장으로 지내다가 면 서기로 근무

《생 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대한(韓)독립만세의 기(현수막)를 만들때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중 한(韓)자를 적어 내었다.세(歲)자는 주동자(박대호)가 적었다.(참의부에서 한세진(韓世振)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에서 고찰해 볼수있다.즉 한(韓)자는 최윤구가 세(世)자는 박대호가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하여 韓世振 振은 떨칠 진자이다.)

국민대회 유생으로 참가 후 일본군경이 추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게된다. 그는 아내 밀양 박씨와 기차를 타고 무사히 이역만리 만주에 도착한다. 얼마후 1919년 7월에 한교공회(조교공회)에 외교위원으로 참여한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 입단하여 맹활동을 하였다.

■1924년~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 참의부(參義府)에서 김창대.김창천.김창강(金蒼大.金蒼天.金昌天.金昌岡.金蒼岡)이름으로 제5중대장과 제1중대장을 활동 하면서 압록강 연안에서 주로 군자금 징수를 하였다.

■1927년 6월 1일 부터는 참의부 군사위원(군사부장) 최동경.최세웅.(崔東京.崔世雄)이름으로 군사부장 겸 제2중대장을 맡아 대일 항전에 싸워

나갔다.

■1928년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 한세진(韓世振.崔世雄)이름으로 제3중대장을 엮임 하였다.

■1929년에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삼부통합에 있어 崔允九는 여기에 참여 하였다.이른바 민족유일당 이였다. 이어 국민부.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설립을 이루어 낸것이다.군사위원회는 위원수는 14명으로 한다. 책임자는 3명으로 총사령.부사령.참모장으로 하며 기존의 10개 대를 7개 대로 편성 하였는데 조선혁명군 군사위원회는 아래 지도하에 1개의 중대를 기본으로 삼았다. 1개 중대는 3개의 소대로하며 "현재 8개 중대가 있으므로" 각 중대는 각 각 3개 방면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각 중대별 배치는 다음과 같다. 이중 崔允龜는 제1방면 7중대장으로 활동 하였다.

  • 제1방면[신빈현.유하현] 제3중대장 金得海 제7중대장 崔允龜
  • 제2방면[통화현.즙안현] 제1중대장 崔 峰 제2중대장 趙化善
  • 제3방면[관전현.환인현] 제4중대장 金京根 제8중대장 金昌善 제6중대장[국민부공안대 임시편성] 張明道 제5중대 유격대 길림.[吉林]을 정하였다.

혁명군인은 군규(軍規)를 엄수하고 군대 책임자의 성명은 물론 군사 행동에 대해서 절대 비밀을 엄수한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조선혁명군이 당시 남만지역 대부분을 관할지역으로 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7집 2021 양지선 48면*
창설 1929년4월~12월까지 국민부=조선혁명군 정착과정서(중국 국민당과 협력관계 고려) 민족주의=사회주의 각회 파벌 싸움으로 편제도(1930년까지"즉 이종락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 후에 이종락은 변절 양정우 부대에게 총살 당함/중국 국민당 탄압을 피하기 위해 재만 조선혁명군사령부로 바꿈)다향하다.

■1930년에 들어서서 장백현에서 삼부에 속에 있던 대원들과 지방위 독립운동가들을 적에게 밀고하여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崔允龜대장은 동지들과 취췌 하러 『흥경(興京)에서- 장백현』 출동하여 4개부락을 전수조사하여 노름판을 단속 하였고 가정파탄이 나고 심각한 독립운동가 밀고등을 해결하고 군자금 90원을 취득했다.

■1932년에 본격적인 한중연합으로 대일 항전에 나서게 된다.2월초 崔允龜는 조선혁명군 제2소대장을 거쳐 연합전선에서 조선특무대 사령부 성립후 8 개 지대로 편성한다. 그중 崔允龜는 제 7 지대장(支隊長)을 맡는다.그리고 원 조선혁명군 제 2 중대장과 제 4 사 사령관을 엮임하면서 영릉가성 전투와 청원현.흥경현전투.쾌대모자 단독 전투에서 적 80여 명을 전멸시켜 영웅적인 전투를 하여 명성과 더불어 대승리를 하여 한.중간에 협력 동지로 가까워 지는 계기가 되었다.조선 동포와 중국 국민들도 대단히 환호 하였다.

■1933년~1934년에는 조선혁명군 제7중대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 전투에서 승리 하였으며 군사위원회 위원등 활동과 정미소를 운영하는 박창선에게 쌀(백미)당시100 가마의 값인 현금으로 군자금을 받았다.그리고 조선총독부등 에서는 최윤구에게 현상금 1만원을 내걸었다. (조선일보 1934년10월1일자 조선혁명군 제7중대장 최윤구(崔允九)로 이름을 밝힌다.)

■1935년~1936년에 조선혁명군 제2사 제1연대장과 제2사 사령관(제2사 사장)을 엮임 하였다.그리고 일.만군과 여러 지역 전투에서 전개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조선일보 1935년7월13일자에는 崔應九(崔允九)명으로 제2사령관으로 보도하고 있다.)

■1937년 4월 이후 일.만군의 대토벌을 감행하여 변절자가 속출하자 최윤구(崔允龜경북청도)는 박대호(朴大浩)와 대원 60여 명을 이끌고 동북항일연군과 합류하게 된다.

■1938년3월말 제1로군 제1군장 양정우와 협의하여 한인독립사를 설치하여 함께 싸울것을 협력 하였다.이에 崔允龜가 "한인독립사" 사령으로 추대하고 朴大浩는 참모장(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고 연대하여 항일투쟁에 전개 하였다.

■1938년 이후에도 동북항일연군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경위연대 산하 교도대대에 속해 있다가 7월경 경위연대가 경위여단으로 확충될 때 갈라져 나와 제1군 교도대대 대대장 겸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중국 길림성 樺甸市 “1938년 말 양정우가 거느리는 抗聯(항련) 1로군 警衛旅(경위려)와 少年鐵血隊(소년철혈대)는 紅石砬子(홍서랍자) 강남 小柳樹河子(소유수하자)에서 야간을 틈타 僞靖安軍(위정안군)(만주국군)을 기습하여 적군 100여 명을 섬멸하고 적기 1대를 격추시켰다. 화가난 일.만군은 만회하기 위해 통화현에 본부를 두고 병력을 군.경등 연합하여 토벌하게된다.

■1940년1월 마비고산 전투에서 아군은 병력을 많이 잃었다.이어 僞靖安軍(위정안군)들은 계속해서 귀순자들을 앞세워 양정우.최윤구가 이끄는 부대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기위해 병력 600여 명이 포위(일명 참빚 머리빚기)작전으로 양정우.최윤구를 추적하여 대대적으로 격전이 벌어 진다. 아군적군 할거없이 전사 하였다.<<즉 1940년 2월의 《토벌순보》는 2월 1일부터 2월 10일까지 기간 양정우가 거느린 부하들이 적군 및 그 괴뢰들과 벌린 12차의 전투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가장 특별했던 점은 그 해 섣달 그믐날이 2월 7일이였는데 이날에도 3차의 전투를 치렀다는 것이다.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거기에 탄약과 식량마저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양정우.최윤구 부대는 끝까지 항전(抗戰)하다가 전사.순국 하였다.>>

■그날이 1940년 2월 15일 최주봉 증 귀순자들이 인솔한 일 · 만(日滿) 연합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를 추적할 때 최윤구는 교도대대를 이끌고 양정우를 엄호하다가 전사.순국 하였다,

그후 양정우도 8일만에 전사하고 만다.

-(참고문헌)- 1

무장독립운동비사 (채근식.1949)165면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7집 2021 양지선 48면

韓國獨立史(金承學, 1965) 하권 287면/ 金承學 독립문화사 刊 1965/ 372~747면(崔允九=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제(1간부(幹部)로 만주(滿州)에서 항쟁(抗爭)하더니 왜적(倭敵)과 교전(交戰)중(中) 전사(戰死)하다.747면

勸力의 歷史(李命英, 1983) 101·103·104면

항일투쟁반세기(김 양.1995)292면

附錄 最近全鮮治安維持法違反事件確定判決集(第七輯 (원전자료)

梁世奉:朝鮮革命軍 總司令의 硏究(丁原鈺, 1989), 國史館論叢 제8권 263∼264·266면--------

朝鮮革命軍 硏究(張世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권, 1990) 329면--------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抗日衛軍의 聯合作戰(朴昌昱, 1992) 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681·683·688·690∼692·696·697면

朝鮮革命軍政府 硏究(張世胤, 1997)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 257면--------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답사기(박화, 2011) 37면 참조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154·159면--------(원전자료)

朝鮮革命軍의 狀況에 關한 件(新派秘 第342號, 1937. 6)--------(원전자료)

한국독립운동사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제6권 669·671면

滿洲 및 中國에서의 地下秘密團體에 대하여(1936), 在滿不逞團 現勢一覽表 (원전자료)

한국 항일독립운동사 연구(신용하.2006) 298.302.304.312.313면

김일성 1912-1945 하권 역정과 결전 (유순호.2020) 426.427.768면--------


《상훈과 추모》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되었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3동 (삼각산) 산 87-1 "국가보훈부가 설치.관리"하고있는 위령탑과 여래사 봉안소에 나라를 위해 순국한 373위 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순국선열봉안소 및 위령탑. 1958년 2월 5일 대한불교조계종 여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 순국선열 373인의 위패를 봉안하는 봉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위령탑을 세웠다. 이에 위령탑에 최윤구(崔允龜)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순국선열봉안소에 崔允龜 위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