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끼아빠/연습장

광탄면
廣灘面

로마자 표기Gwangtan-myeon
행정
국가대한민국
지역경기도 파주시
행정 구역32, 112
법정리분수리, 방축리, 마장리, 발랑리, 창만리, 용미리, 신산리, 기산리, 영장리
관청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1044
지리
면적65.51km2
인문
인구11,637명(2019.12.31.)
세대5,961세대
인구 밀도177.6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광탄면사무소

광탄면(廣灘面)은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이다. 북쪽으로는 법원읍, 북서쪽으로는 파주읍, 서쪽으로는 월롱면조리읍, 동쪽으로는 양주시 광적면백석읍, 남쪽으로는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구.벽제읍)과 인접해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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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대에는 술이홀현에 속한 곳이었으며, 그 후 통일신라 때 한주의 봉성현, 고려 전기에는 양주, 후기에는 양광도의 서원현,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에 속하였다. 광탄면(廣灘面)은 본래 파주군 소속이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광탄의 위치를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양주에서 흘러오는 광탄천(廣灘川)의 언덕에는 광탄원(廣灘院)이 있어 한양으로 드나들던 나그네가 많이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나 『파주목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광탄면의 위치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이들 문헌에는 광탄면이 관문의 동남쪽으로 25리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광탄면의 중심지까지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도』, 『지방도』의 파주편에는 광탄면과 광탄이 모두 표기되어 있으며, 광탄면의 동쪽에서 광탄이 발원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양주군 백석면(白石面)의 일부를 편입하였는데, 1987년에 다시 기산리 일부가 양주군 백석면에 이관되었다. 광탄이라는 이름은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光積面)에서 두 지류가 서쪽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문산천(汶山川)으로 흘러들어 넓은 여울을 만들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1]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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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탄면은 지형 특성상 운정신도시나 일산신도시 보다는 통일로를 따라서 이어진 연신내, 삼송, 구파발 등이 더 왕래가 용이하다. 용미리에는 서울시립공동묘지가 있어 명절에는 통일로 주변의 교통 체증이 극심해진다. 그나마 2016년 7월21일 국지도 78호선이 확포장 공사가 완료되어 교틍체증이 다소 해결되었다.[2]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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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파발빵(구 마패빵): 2016년 7월 부터 광탄면 마장두레마을 혐동조합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마패모양의 빵이다. 전통적인 특산물이 아닌 파주시에서 지역 특산품으로 개발한 빵이며 경주 황남빵, 천안 호두과자 같이 브랜드화 할 방침이었다.[3] 그러다 2020년 파주파발빵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청년사업가 육성과 연계하여 지역 먹거리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4]

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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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탄전통시장은 광탄면 신산리에 위치한 광탄시장은 상설시장으로 알짜배기 전통시장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종 양곡과 야채, 과일, 잡화 등 옛 시장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맛있는 먹거리들로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016년 골목형시장으로 선정되어 전국최초 "경매"시장으로 육성되어 매주 토요일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 위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1118
  • 특징: 상설시장 외에도 매월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 주기적으로 열린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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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심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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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김포(金浦)에서 태어나 파주(坡州)에서 성장하였다, 호는 우산(又山)이며 현감 정택(定澤)의 아들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3월 10일 파주지역에서도 임명애(林明愛) 등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3월 25일에도 구세군(救世軍)인 염규호(廉圭浩)가 김수덕(金守德) ㆍ 김선명(金善明) ㆍ임명애 ㆍ 김창실(金昌實) 등과 더불어 시위를 계획하여 3월 26일 와석면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김웅권(金雄權) 등과 함께 군내 월농(月籠) ㆍ 교하(交河) ㆍ 아동(衙洞) ㆍ 조리(條理)면 등지의 장날을 이용하여 군 전체가 봉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3월 27일 2,000명의 시위군중이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조리면 봉일천리(奉日川里) 장터로 행진하여 그 곳에 있던 1,000여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를 주동한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농업전문학교에 적을 두고 신교육을 받으면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약 10년간의 임시정부 활동을 마감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廣灘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장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하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계 박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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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1년(인조9)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호의 하나인 남계는 지금의 광탄면 창만리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로, 박세채는 만년을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의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과 박태유, 박태보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를 배경으로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다. 1638(인조16) 7세의 어린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 생활 1년 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원래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율곡을 매우 존경하였다. 그 무렵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체는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어 이에 분개하여 과거시험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에는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彌),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의 문하에서수학한 것을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승하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크게 거론되자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석(朞年設)을 지지하여 서인 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남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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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민(1896~1974)은 광탄면 발랑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 광탄면 발랑리에서 조무쇠, 이인옥, 이기하, 정갑석 등과 주민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리면 봉일천리 장터까지 진행했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혔다. 1919년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파주독립광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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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 합방부터 광복직전까지 계속되었던 파주의 독립운동 중 가장 큰 만세 운동이 벌어진 1919년 3월 28일 광탄면 발랑리 출신 주민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업적을 기리고 당시 희생된 분들의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당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아닌 주민들과 독지가 분들의 자발적 도움으로 태극기 마을을 만들고 기념공원을 만들었다.[5]

관광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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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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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산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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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광탄면에 자리한 박달산( 360m)은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고 부르게 됐으나, 이웃 다른 마을에서는 이 산이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명산 남북맥으로 뻗친 이 산은 능선을 형성해 만장산에 닿았는데 산기슭에 있는 마당 바위에서 완원군 9대손 이건섭이 산 아래 연못에 내려가 목욕하는 한편 오직 벼슬을 마다하고 공부에만 전념하였다고 해 이곳을 처사바위, 처사탕이라한다.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언해』를 숙종 때 권대련, 변매가 이 산에서 통달하였다 하여 호칭됐다고도 한다.

  • 위치: 광탄면 장지산로 200번길
  • 산행코스: 광무정 - 정자전망대 - 삼각정봉 - 헬기장 - 안부사거리 - 박달봉정상

금병산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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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산(錦屛山)은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병풍을 둘러 친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영조가 생모 최숙빈의 묘지를 찾아 소령원에 왔다가 말구리재에 올라서 '앞에 보이는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낙엽이 떨어져 나간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풍락산으로 불린다고 합니다'라고 답을 올렸다.영조는 '금으로 병풍을 친 것 같으니 앞으로는 금병산으로 불러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 위치: 광탄면 방축리 일원
  • 산행코스(1코스): 삼방리 고개 - 금병산 - 어둔동입구 - 노고산갈림길 - 백경수
  • 산행코스(2토스): 발랑1리(신촌동) - 분투골전원마을 - 금병산 - 체육공원 - 신촌동

고령산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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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621.8m로,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와 영장리,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장흥계곡에 걸쳐 있으며,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높이가 별로 높지 않으나, 경기도 북서지역에서는 감악산(675m)과 더불어 가장 높은 산으로 꼽힌다. 북쪽으로 양주시가, 남쪽으로 북한산 백운대가, 동쪽으로 불국산, 사패산, 도봉산 등의 봉우리가 있다. 산 아래에 있는 보광사는 894년(진성여왕 8) 도선국사가 왕명으로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산기슭에는 도솔암이 있는데, 말 그대로 소나무로 둘러싸인 암자이다. 도솔암에서 조금 더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은 평탄한 공터이며, 북쪽으로 감악산이 보인다. 정상 남쪽의 봉우리는 군사지역으로 산행할 수 없다.

  • 위치: 광탄면 보광로 474번길 87
  • 산행코스: 보광사 - 도솔암 - 헬기장 - 정상(앵무봉) - 서릉 - 전망대 - 보광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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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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