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hiwoo1/최영손

최영손 [崔泳孫 ?~1455] 조선조 무신. 단종 충신배식단에 배향.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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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통천(通川)이고,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정렬공 최윤덕의 4형제 중 4남이다.

새종대에 무과에 올랐으며, 1433년에 아버지 최윤덕의 군관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정벌에 참가하였다. 단종 1년에는 행호군으로 사복시에 출사를 하라는 명을 받았다.

1455년(단종 3년)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왕위를 위해 기반을 마련해 나가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금성대군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금성대군사건에 연루되어 변방에 충군되어진다. 이후 무용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결국 세조 1년에 금성대군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후대를 유실하였다.

이후 1791년 9월 (정조 15년)에 사면되어 종질 최로, 내은덕과 함께 단종 장릉 충신배식단에 배향되었다.

기록 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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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간단한 것은 우선 실록에 중앙의 경직에 오른 기록이 없고, 세조의 등극과정에서 반대편에서 대립했던 금성대군과 연관되어 상당한 기록들이 누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고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세조와 대립 하였던 왕의 종친들도 대부분 죽었으며, 종친록에서 조차 삭제되는 등의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게다가 복권이 이루어진 시기도 금성대군사건이 일어난 이후 300년이나 지나 정조대에 이루어진 것을 볼때 타탕성이 있다.

세조등극 과정에서 특히 북방의 군무 기록들이 상당수 누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아버지인 정렬공 최윤덕4군의 설치와 북방의 안정을 위해 파저강정벌 이후에도 계속 평안도 도절제사를 겸하였고, 형 최숙손도 정벌 이후 두번이나 평안도 4군지역(판여연도호부사, 판창성대도호부사)에서 군무에 있었음이 기록에 남아있다. 주지할 것은 당시 무과를 거친 무관의 자손들이 아비를 호종하며 군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렬공 최윤덕도 무과에 급제한 이후에 관직제수에 대한 기록은 아비인 최운해장군이 영해의 전투에 참가한 때에 군관으로 참가한 기록이 처음이다.

또한 실록에서 금성대군의 사건과 연루된 후 단지 무용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조와 문종조에 4군 지역과 6진 지역등의 북방지역에서 군무를 보았고, 공을 상당히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 무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들이 대부분 북방의 영토확장과 안정을 위한 군무에 종사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세조등극에 반대하는 난을 일으켰던 이징옥을 비롯하여, 당시 중앙의 경관을 계속 맏아오던 문신 김종서도 함경도에서 군무를 하면서 후대에는 문신이 아닌 장군으로 알려진 것을 보면 타당하다 하겠다. 실록 기록상에 나타난 소유 전토등의 기록을 보아도 타당성이 있다.

또한 형 최숙손이 중앙경직에 있을 때, 문종서거 시에는 궁성사면절제사를, 단종조에는 명나라에 사은사를 가는 등 중앙관직에서 중요 업무들을 맏았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기록이 부실한데,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사건의 일련의 과정에서 모든 형제들이 휘말리면서 많은 기록들이 삭제되고 누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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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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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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