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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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古朝鮮)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阿斯達)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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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건국 초기 졸본부여에서 세력을 키운 추모(성씨는 해 또는 고)가 건국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며 국호를 고구려 스스로 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107년 기록에 . 그 후 국내외 사료에 남은 기록대로 편의에 의하여 '고려' 등을 혼용하였으며 고구려 후기의 주요 사료의 기록에는 '고려(高麗)'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변경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이는 고구려 후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유로, 중국 측의 사료에는 예/맥/고리/구려/요동 등으로 고구려를 호칭했다. 훗날 대조영의 대진국(발해)의 경우도 국서에는 [고려국]이라고 자칭한 유물 있으며 왕건이 개국한 고려와도 구별하기 위해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高句麗)로 통용하며(조선의 경우와 같음) 국호의 경우, 사료와 연구 부족으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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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다.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 통일하기에 이른다.

백제국은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남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에는 전라도 부족국가들을 대부분 통일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었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고 결국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그 후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 백제의 왕자 풍을 왕으로 모시고 항쟁을 이어갔지만 내분으로 인해 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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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가 자신들을 다스려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였다. 기원전 27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내물 마립간 (재위: 356년 ~ 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10]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 (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